신임
신임(申銋) | |
대표명칭 | 신임 |
---|---|
한자표기 | 申銋 |
생몰년 | 1639년(인조 17)-1725년(영조 1) |
본관 | 평산(平山) |
시호 | 충경(忠景) |
호 | 한죽(寒竹), 한죽당(寒竹堂, 죽리(竹里) |
자 | 화중(華仲) |
시대 | 조선 |
부 | 신명규(申命圭) |
모 | 남호학(南好學)의 딸 |
정의
고려 후기의 문신.
내용
신임(申銋)은 대사성(成均館) 신민일(申敏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령(掌令) 신상(申恦)이고, 아버지는 집의(執義) 신명규(申命圭)이다. 어머니는 남호학(南好學)의 딸이다.[1] 부인 기계유씨(杞溪兪氏)는 유정(兪楨)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신사원(申思遠)은 한성부 판관을 지냈는데, 아버지 신임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슬퍼하였으므로, 그 효성(孝誠)으로써 정려(旌閭)되었고,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장녀는 군수 이수현(李秀賢)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사인(士人) 이화신(李華臣)의 처가 되었다.[2]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3]
1686년(숙종 12) 정시문과에 급제, 특히 연안부사(延安府使)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으며, 예조·병조·호조·이조의 참의(參議)를 지냈다. 승지·대사간·대사헌·중추부지사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참찬·공조판서가 되었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老論)의 중진들이 제거되는 것을 항의하다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해남(海南)에서 병사했다.[4]
신임은 얼굴 모양이 크고 아름다웠으며, 어려서부터 대인(大人)다운 기국(器局)과 도량(度量)이 있었다. 평생 동안 재산을 마련하려 하지 않았고, 좋아하는 물건들을 욕심을 내서 쌓아 두지 않았다. 벼슬한 지 40년이 되었으나, 집에서는 전곡(錢穀)을 꾸어다가 생활하였고, 질화로에 작은 소반만 있는 한 칸 방에서 단출하게 살았다. 또 10년 동안 이조(吏曹)에서 전형(銓衡)을 맡아보았으나, 문정(門庭)에는 청탁하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항상 대문 앞은 물로 씻은 듯 깨끗하였고, 문을 닫고 누워 있으면 어떤 때에는 적막(寂寞)한 것 같았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 주곡(注谷)에 있는데,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5]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김용곤, "신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26일. - ↑ 이기순, "신임(申銋)",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용곤, "신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5월 26일. - ↑ "신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이기순, "신임(申銋)",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