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왜구의 침입
왜구의 침입(倭寇의 侵入) | |
대표명칭 | 왜구의 침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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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倭寇의 侵入 |
유형 | 전투 |
시대 | 고려-조선 |
관련인물 | 최영,이성계,최무선,정지 |
목차
정의
13-16세기에 걸쳐 우리나라 연안에 일본의 해적이 침입하여 인명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한 사건.
내용
개요
왜구(倭寇)는 고려말, 조선초에 가장 심하여 고려 말 약 40년간은 피해가 커서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왜구는 '왜가 도둑질한다'는 뜻이지만, 고려말 이래 그들의 약탈 행위가 잦아지면서 왜인들의 해적 행위를 표현하는 명사가 되었다. 왜구는 일본의 남북조 혼란기에 남조 세력권에 있던 규슈(九州)일대의 일본인들로서, 주요 근거지는 쓰시마(對馬)·마쓰우라(松浦)·이키(壹岐) 등이었다.
고려말 왜구침입
1223년(고종 10)에 왜구가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에 첫 침략 이래 해마다 왜구가 이어지자 고려는 1227년(고종 14) 박인(朴寅)을 일본에 파견하여 왜구 금지를 요구하였다.
왜구는 1350년대를 전후한 충정왕 때부터는 그 규모가 100척 이상으로 확대되어 점차 경상·전라·충청·경기의 연안에까지 그 활동무대를 넓혀, 때로는 황해도·평안도에서도 노략질을 하였다. 왜구의 약탈대상물은 주로 서울로 올라가던 조운선(漕運船)이었으며, 육지에 올라와서는 재물은 물론 사람까지 납치하여 노예로 팔아넘기는 등 만행을 일삼아 연안과 농어촌 사회를 파괴하였다. 또한 왕릉을 도굴, 이른바 문화재를 훔쳐가는 등 그 피해가 극심하였다.
고려는 1366년(공민왕 15) 김일(金逸)을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의 쇼군(將軍)에게 보내어 왜구 금지를 요구하였고, 이를 근절시키겠다는 약속을 받기도 하였으나
일본 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이어서 큰 실효는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군사제도를 정비하고 국방 강화에 힘을 기울여 농민 시위군과 수군을 조직하고 기존의 해안 지역에 산성과 읍성등의 방어시설을 강화하였다. 1377년(우왕 3)에는 최무선(崔茂宣)의 건의에 따라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약·화포 등 각종 화기를 제조함으로써 왜구 격퇴에 큰 효과를 거두었다.
왜구의 격퇴
1376년(우왕 2) 7월 충청남도 연산 개태사(開泰寺)에 왜구가 쳐들어와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전사하는 등 피해가 심하자 최영은 출정을 자청하여 충청남도 홍산에서 왜구를 거의 전멸시켰다. 이 싸움에서 최영은 몸에 적의 화살을 맞고도 끝까지 부하들을 진두 지휘하였으며, 이후부터 왜구들은 최영을 백수 최만호(白首崔萬戶)라 불렀다고 한다. 1380년 (우왕 6)에는 금강어구의 진포(鎭浦)에 정박한 왜선 500여척을 나세·심덕부·최무선등이 화포를 사용하여 모두 불태웠으며, 이때 상륙하여 남부지역을 노략질하던 왜구를 이성계가 지리산 황산(荒山)에서 크게 무찔러 왜구의 기세를 꺾을 수 있었다. 1383년에는 정지(鄭地)가 남해 관음포에서 큰 전과를 올렸고, 1389년(창왕 1)에는 박위(朴位)가 전함 100척을 거느리고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를 소탕하여 왜구의 침입은 뜸해졋다.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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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 홍산전투 | A은 B에 참가하였다 | 1376년 |
이성계 | 황산대첩 | A는 B에 참가하였다 | 1380년 |
최무선 | 진포대첩 | A은 B에 참가하였다 | 1380년 |
나세 | 진포대첩 | A는 B에 참가하였다 | 1380년 |
심덕부 | 진포대첩 | A는 B에 참가하였다 | 1380년 |
정지 | 관음포 | A는 B에서 왜구를 격파하였다 | 1383년 |
박위 | 쓰시마 | A는 B를 공격하였다 | 1389년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 MK미디어-제29회 황산대첩 재현(촬영일: 2015년 08월 19일)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