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개
신용개(申用漑) | |
대표명칭 | 신용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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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申用漑 |
생몰년 | 1463-1519 |
본관 | 고령(高靈) |
시호 | 문경(文景) |
호 | 이요정(二樂亭)·송계(松溪)·수옹(睡翁) |
자 | 개지(漑之),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대표저서 | 『이요정집』,『속삼강행실도』 |
대표직함 | 우의정, 좌의정 |
부 | 신면(申㴐) |
모 | 정호(丁湖)의 딸 |
상훈 | 원종공신(原從功臣) |
성격 | 문신 |
정의
신용개(申用漑, 1463∼1519)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내용
생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개지(漑之), 호는 이요정(二樂亭)·송계(松溪)·수옹(睡翁). 대제학 신장(申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신면(申㴐)이다. 어머니는 우군사용(右君司勇) 정호(丁湖)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1]
정치활동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해 처음으로 승문원정자에 등용되었다. 그 뒤 수찬, 교리, 지평, 이조정랑, 검상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2]
- 무오사화
1498년(연산군 4), 성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사관이자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훈구대신들의 비리에 대한 비난, 계유정란과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기재한 일로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이 능지처참되거나 귀양보내졌다. 신용개 역시 투옥되었으나 이전 해부터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 없었다는 이유로 석방되어 도승지의 벼슬을 받았다.[3]
- 갑자사화
1504년(연산군 10) 궁중에서 낭비되는 예산 문제로 조정 대신들과 궁중세력 사이에 마찰이 생겼다. 이 때 궁중에서 세력을 거치고 있던 임사홍 등이 조정의 원로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연산군에게 윤씨가 폐비된 경위를 알렸다. 이에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조정 대신, 그리고 윤씨를 다시 왕비로 추존하는 일을 반대하는 신료들이 대거 처형당하였다.(갑자사화) 신용개는 당시 언관으로서 폐비 윤씨의 왕비 추존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가 관직을 박탈당하고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되었다. [4]
- 중종 반정 이후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형조참판으로 서용되었으며, 이어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성희안(成希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고명(誥命)을 받아온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그 뒤 대제학·우참찬과 대사헌을 거쳐서 이조·병조·예조의 판서를 역임, 우찬성이 되었다. 1516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1518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5]
평가
기품이 높고 총명하여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하였다. 인품 또한 꿋꿋하여 범하지 못할 점이 있어 당시 선비들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성종은 신용개의 높은 학덕을 사랑하여 어의(御衣: 임금의 옷)를 벗어 입혀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저서로는 『이요정집』이 있고, 편서로 『속동문선』· 『속삼강행실도』가 있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