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중
목차
정의
조선 후기의 백관 중 문신으로 노론이었으나 소론과 입장을 같이 하기도 했다. 군사제도와 운영에 박식하여 병서를 저술하였고, 기근 구제에 공이 있었다. 『금보개조도감의궤』 도제조,[1] 『금보개조도감추보의궤』 도제조[2]를 역임하였다.[3]
내용
관직
1673년(현종 14) 학행으로 추천을 받아 동몽교관을 지냈으며 1680년(숙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다음해 광주부윤이 되었다. 승지, 경상도관찰사, 어영대장, 예조참판 겸 비변사 당상 등을 역임하였고, 1687년(숙종 13) 형조판서 겸 종묘와 빙고의 제조를 지냈고 다음해에 지중추부사를 거쳐 우참찬이 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여 금천에 퇴거했으나 남인의 탄핵을 받아 안변부사로 밀려났다. 다음해에 동지부사로 청에 다녀오고 경주부윤, 안변부사 등을 역임했다. 1694년(숙종 20)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남인 처벌에 온건한 경향이 있어 탄핵되었다. 소론 박세채(朴世采)의 도움으로 1696년 훈련대장,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1698년 우의정, 다음해에 좌의정, 그 다음해에 영의정이 되어 기로소(耆老所)[4]에 들어갔다.[5]
학문
군사제도와 운영에 관심이 많았으며 역사에 정통했다.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할 때 지리ㆍ군사서적인 『해방지(海防誌)』를 저술하였으며 정승으로 재직할 때 『군국총부』를 저술했다. 조선시대의 고사를 엮어 『조야기문(朝野記聞)』, 『상제례가범(喪祭禮家範)』, 『역대재상연표(歷代宰相年表)』, 『국조대신연표(國朝大臣年表)』, 『병가승산(兵家勝算)』, 『동인시화(東人詩話)』 등의 저서를 남겼다.[6]
사후
파주시 군내면에 묘가 있으며, 1736년(영조 12) 시호를 받았다.[7]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서문중 | 종묘의궤 | A는 B의 주관자이다 | |
서정리 | 서문중 | A는 B의 아버지이다 | |
이시발 | 서문중 | A는 B의 외조부이다 | |
경주 이씨 | 서문중 | A는 B의 어머니이다 | |
서원리 | 서문중 | A는 B의 양부이다 | |
김시희 | 서문중 | A는 B의 장인이다 | |
김씨 | 서문중 | A는 B의 아내이다 | |
서종보 | 서문중 | A는 B의 장남이다 | |
서종예 | 서문중 | A는 B의 차남이다 | |
서종유 | 서문중 | A는 B의 삼남이다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 ↑ 외규장각 의궤 금보개조도감의궤
- ↑ 외규장각 의궤 금보개조도감추보의궤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문중
- ↑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 연로한 관원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서로, 본래 이름은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였다가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변경되었고 약칭으로 기로소라 불렸다. 문과 출신 정 2품의 문관으로 70세 이상인 사람이 들어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기로소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문중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문중
- ↑ 『영조실록』 42권, 영조 12년 12월 2일 신유 4번째 기사, '고 영의정 서문중에게 공숙·좌찬성 박진에게 의열이라는 시호 등을 내리다.'
- ↑ 문화재청 서문중 초상
- ↑ 문화재청 서문중 초상함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현종실록』
- 『숙종실록』
- 『숙종실록보궐정오』
- 『한국계행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문중
- 두산백과 서문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