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복지재단
태화복지재단(泰和福祉財團) | |
대표명칭 | 태화복지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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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泰和福祉財團 |
유형 | 사회정치단체 |
소재지 | 서울 |
창립자 | 매미 마이어스(Mamie D. Myers) |
창립시대 | 일제강점기 |
창립일 | 1921년 |
주요업무 | 국내,해외 사회복지사업, 사회복지 연구사업, 사회복지인력양성 |
웹사이트 | http://www.taiwhafound.org |
목차
정의
1919년 일어난 3.1운동 당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가리킨다.
설명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나라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 선언(2.8독립선언)을 한 데에 자극을 받아 국내에서도 독립 선언을 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서로 다른 단체들에 의해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던 기존 활동과는 달리 각계를 아우르는 통합 민족 단체의 필요성 또한 대두되었다. 이에 일제의 감시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종교계를 필두로 독립선언에 관한 논의가 1919년 2월경부터 진행되었으며, 특히 천도교와 그리스도교는 3.1운동의 초기 조직단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민족대표 결성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이 손병희를 만나 상의한 데 이어, 송진우·현상윤·최린·최남선 등이 독립선언 진행방법 등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천도교·기독교·구한말의 유지를 조선민족대표로 하여 그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이유서를 각국에 보내기로 결정한 후 서명할 인사들을 찾아나섰다. 송진우·최남선은 구한말의 대신들을 만나 상의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해 민족대표에서 그들을 제외키로 했다.
한편 기독교 측은 이승훈, 천도교 측은 최린이 각각 교섭에 나서 많은 동지를 얻었으며, 이를 안 불교 측에서도 한용운·백용성 등이 가담하였다. 최종적으로 기독교 측 16명, 천도교 측 15명, 불교 측 2명으로 모두 33명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로 결정하고 총대표에 손병희를 추대함으로써 민족대표 33인이 결정되었다.[1]
독립선언서 제작
독립선언서 작성은 천도교에서 총괄하였다. 천도교 측의 원고 지침에 따라 최남선(崔南善)이 기초를 작성하고, 천도교 인사 오세창(吳世昌)이 인쇄 총책임을 맡았으며, 천도교 직영의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이 총실무를 담당했다. 2월 27일 극비리에 독립선언서 2만 1000장이 인쇄되었고 각계 인사들에 의해 사전 배포가 이루어졌다.
독립선언서 낭독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으나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모였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기존에 약조했던 파고다공원이 아닌 인사동에 위치한 음식점 태화관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그들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다.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상하이로 망명해 체포를 피한 김병조와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은 길선주, 그리고 체포 직후 구금 중에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들 중 손병희 등은 복역 후 병사하였다.[2]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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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섭-민족대표의 독립선언 | 민족대표 33인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
민족대표 33인 | 3.1운동 | A는 B를 주도하였다 | 1919년 3월 1일 |
민족대표 33인 | 3.1 독립선언서 | A는 B를 저술하였다 | 1919년 2월 |
민족대표 33인 | 태화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민족대표 33인 | 서울 탑골공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길선주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손병희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권동진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오세창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임예환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나인협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홍기조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박준승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양한묵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권병덕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김완규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나용환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이종훈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홍병기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이종일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최린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이승훈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박희도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이갑성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오화영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최성모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이필주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김창준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신석구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박동완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신홍식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양전백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이명룡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한용운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백용성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김병조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정춘수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
유여대 | 민족대표 33인 | A는 B의 일원이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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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8일 | 조선인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일으켰다. |
1919년 2월 | 민족대표 33인이 3.1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다. |
1919년 3월 1일 | 민족대표 33인이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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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71986 | 126.984834 |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상)』, 서문당, 1920.
- 신복룡, 『한국사 새로 보기』, 도서출판 불빛,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