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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대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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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7월 25일 (화) 13:30 판 (윤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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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대승사
(聞慶 大乘寺)
대표명칭 문경 대승사
한자 聞慶 大乘寺
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사불산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건립시기 587년



정의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에 있는 절로 직지사(直指寺)의 말사.

내용

역사

대승사는 587년(진평왕 9)에 창건하였는데, 절이 창건된 시기는 신라에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된 지 70여 년이 지난 때였으므로, 대승사는 신라불교의 개척자와 같은 존재였고, 왕이 직접 행차하여 창건을 명하였으므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이었다.[1] 고려 고종 때 상주목사 최자(崔滋)는 대승사의 서남쪽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를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조선 초기 득통기화(得通己和, 1376-1433)가 이 절의 조전(祖殿)에 있으면서 『반야경(般若經)』을 연구하였고, 반야사(般若社)를 결성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2] 1644년(인조 22)과 1722년(경종 2)에 의현(義玄)·종수(鍾守) 등이 중수하였고, 1831년(순조 31) 구담(九潭)이 중창하였다. 1922년 대화재로 불타, 의운(義雲)·덕산(德山)이 복원시켰는데, 1956년 또 대화재가 발생, 명부전과 극락전만 남고 소실되어, 1966년 남인(南印)·대휴(大休) 등에 의해 삼창(三創)되었다.[3]

창건설화

대승사는 587년(진평왕 9)에 창건하였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塔像)」의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四佛山 掘佛山 萬佛山)'조에 대승사 창건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4]

Quote-left.png 죽령(竹嶺) 동쪽 1백리 가량 떨어진 마을에 높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眞平王) 46년 갑신(甲申)에 홀연히 사면이 한 발이나 되는 큰 돌에 사방여래(四方如來: 사방의 불국토에 사는 부처)를 조각하고 모두 붉은 비단으로 감싼 것이 하늘로부터 그 산 정상에 떨어졌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쳐다보고 예경한 후 드디어 그 바위 곁에 절을 창건하고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 하였다. 『법화경(法華經)』을 외우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니를 청하여 절을 맡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돌을 공양하며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 산을 역덕산(亦德山)이라고 하며, 혹은 사불산(四佛山: 대승사가 위치한 산으로, 산 위 바위에 새겨진 사방불에 이하여 산 이름이 지어짐)이라고도 한다. 비구니가 죽자 장사지냈더니 무덤위에서 연(蓮)이 났었다. Quote-right.png
출처: "진평왕때 사불산에 사방여래가 떨어졌다", 삼국유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관련암자

18세기 무렵 대승사에는 9개의 산내암자가 있었다. 미륵암(彌勒庵)·사불암(四佛庵)·상적암(上寂庵)·대비암(大妃庵)·묘적암(妙寂庵)·묘봉암(妙峰庵)·윤필암(閠筆庵)·문수암(文殊庵)·보현암(普賢庵) 등으로, 지금은 이 가운데 윤필암, 보현암, 묘적암, 총지암만이 남아있다.[5]

묘적암

묘적암(妙寂庵)은 646년(선덕여왕 15) 부설(浮雪)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고려말의 고승인 나옹(懶翁)이 출가하여 수행하였던 곳이다. 나옹이 심었다는 회목(檜木)이 지금도 남아있다.[6] 1668년(현종 9) 성일(性日)이 중건하였고, 1900년 취원(就圓)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7] 전각은 법당과 산신각이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8호로 지정된 나옹화상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8]

윤필암

윤필암(潤筆庵)은 1380년(우왕 6) 승려 각관(覺寬)과 김득배(金得培)의 부인 김씨(金氏)가 창건하였다. 각관과 김씨는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입적하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윤필암을 짓고,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에게 기문(記文)을 요청하였다. 이색은 기문의 집필료를 받지 않고 그 돈으로 사찰 건립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는데, 윤필암이라는 암자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윤필은 원래 글을 지어 주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사례금으로써 집필료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제8 지평현(砥平縣) 불우(佛宇) 조에서는 "이색이 왕명을 받들어 나옹의 부도명을 지었다. 나옹의 문도들이 집필료를 마련하여 사례하였는데, 이색이 받지 않고 그 집필료로써 허물어진 절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수리한 암자를) 윤필암이라고 불렀다(李穡以王旨撰懶翁浮屠銘 其徒致潤筆物 穡不受使修廢寺 因名之)."라고 하여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 나옹의 사리탑이 있던 신륵사(神勒寺)회암사(檜巖寺) 외에도, 묘향산(妙香山)‧금강산(金剛山)‧소백산(小白山)‧사불산(四佛山)‧치악산(雉岳山)‧용문산(龍門山)‧구룡산(九龍山) 등 일곱 곳에 나옹의 진영을 모신 진당(眞堂)을 세우고 사리를 나누어 모셨는데, 이 일곱 곳에 모두 이색이 기문을 써 주었고 윤필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색은 「윤필암기(潤筆庵記)」에서 이르기를, 공덕산(사불산의 다른 이름)에 묘적암(妙寂庵)이 있는데 이곳은 요연선사(了然禪師)가 머물고 있을 적에 나옹이 출가했던 곳이니 나옹의 본고향이라고 하였다. 이는 나옹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공덕산에 그의 사리를 봉안한 윤필암을 세우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9]

조선시대에는 1645년(인조 23) 서조(瑞祖)와 탁잠(卓岑), 1765년(영조 41) 야운(野雲), 1806년(순조 6) 취운(醉雲), 1885년(고종 22) 창명(滄溟)이 윤필암을 각각 중건하였다. 근래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던 청담(靑潭, 1902~1971)의 속가 둘째 딸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을 역임했던 성철(性徹, 1912~1993)의 비구니 제자였던 묘엄(妙嚴, 1931~2011)이 출가 수행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10]

관련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주석

  1. 사찰문화연구원, "대승사", 『전통사찰총서 17 - 경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1, 177쪽.
  2. 박상국, "대승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대승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사찰문화연구원, "대승사", 『전통사찰총서 17 - 경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1, 177쪽.
  5. 사찰문화연구원, "대승사", 『전통사찰총서 17 - 경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1, 190쪽.
  6. "묘적암",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7. 박상국, "묘적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묘적암",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9. 이종수, "윤필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이종수, "윤필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