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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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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샘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7월 24일 (월) 16:0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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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제 31대 왕.

내용

개요

공민왕은 고려 제 31대 왕(1330-1374, 재위 1351-1374)으로, 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이며, 이름은 전(顓)이다. 몽골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이며,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다.[1]

업적

공민왕은 고려 말에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였으며, 왕권강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몽골풍을 금지하고 친원파 일당을 숙청하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감정이입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공민왕이었다면 어떤 정책을 추진했을까요? 당연히 우리나라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몽골의 색깔을 완전히 제거하고 자주성을 되찾아야겠죠? 이를 ‘반원자주정책’이라고 합니다. 또 국내에 쌓여 있는 모순을 해결하고 왕권을 강화해야 합니다. 공민왕의 개혁은 이렇게 반원자주정책으로 몽골의 흔적을 지운 후 왕권을 강화하는 2단계로 진행이 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민왕의 개혁 - 고려의 개혁을 추진하고 왕권을 강화하다 (이다지 한국사 : 전근대 편, 2015. 12. 11., 브레인스토어)

공민왕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거리에 돌아다니는 몽골옷을 입고 변발을 한 고려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에 왕명을 내려서 몽골풍을 금지하죠. 공민왕도 즉위 전에야 변발을 했지만, 즉위하자마자 변발을 풀고 몽골옷도 벗어던졌거든요.

또 원나라가 한 단계 떨어뜨려 놓은 관제도 복구해요. 권문세족들도 가만두면 안 되겠죠? 친원파 중 당시 가장 강한 세력을 갖고 있던 사람이 바로 기철입니다. 공민왕은 이 기철 일당을 숙청해요. 그런 이후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없앱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민왕의 개혁 - 고려의 개혁을 추진하고 왕권을 강화하다 (이다지 한국사 : 전근대 편, 2015. 12. 11., 브레인스토어)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민왕은 반원 자주 개혁을 시작했어. 먼저 친원파의 우두머리인 기철을 제거했어. 기철은 원나라에 공녀로 간 여동생이 아유시리다라이라는 아들을 낳고 원황후가 된 것을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리며 악행을 일삼던 인물이었거든. 기철이 강제로 빼앗은 넓은 땅과 많은 재산, 노비들은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어.

변발1)과 호복2) 등 몽골식 생활 풍습을 금지하고, 정동행성을 없앴어. 그리고 쌍성총관부3)를 공격해서 원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철령4) 이북의 땅을 99년 만에 되찾았어.

몽골에 보내던 공녀와 환관도 더 이상 보내지 않았지. 또한 원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각종 시호와 제도들을 다시 고쳤어. 즉 ‘충’자가 들어가는 왕의 시호를 바꾸었는데, 충렬왕은 ‘경효’, 충선왕은 ‘선효’, 충목왕은 ‘현효’라고 다시 지었대.

[네이버 지식백과] 공민왕 [恭愍王] -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파! (한국사 개념사전, 2010. 6. 4., (주)북이십일 아울북)


왕권을 강화하다

관련인물

노국대장공주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왕릉이라는 공민왕릉.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와의 사랑은 700년을 건너뛰어 오늘날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개성 근교에 자리 잡은 공민왕릉은 고려왕릉 가운데 유일한 부부 쌍릉이다. 죽어서도 함께 한 이들의 사랑이었지만, 출발은 정략결혼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의 정치 경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생모가 고려인인 관계로 왕위 계승에서 번번이 낙마한 공민왕은 1349년(충정왕 1년)에 정략적으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고 2년 뒤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365년(공민왕 14년)에 노국대장공주가 난산(難産)으로 죽자, 그녀를 잊지 못한 공민왕은 왕비의 초상화를 벽에 걸고 밤낮으로 바라보면서 울뿐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본래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던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가 살아 있을 때에도 왕비의 침소에 가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노국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한 공민왕은 왕비가 죽은 뒤로 계비를 들이기도 하고, 혹은 신돈과 함께 불공을 드리며 축원하기도 했으나 후사를 얻지 못했다. 그 사이 공민왕은 신돈의 집에 자주 드나들다 신돈의 비첩인 반야라는 미인을 보고 총애하였다. 공민왕의 사랑을 받은 반야는 1365년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공민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이다. 우왕의 어릴 적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였는데 그를 몹시 사랑했던 공민왕은 자주 장난감을 갖다 주며 부정을 나타냈다.

공민왕은 태후의 반대에 부딪혀 모니노를 세자로 삼지 못했으나, 여전히 태후 궁에 두고 우(禑)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강녕부원대군에 봉하였다. 이듬해에는 우가 궁인 한씨의 소생이라고 발표하게 했다. 당시 궁인 한씨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는데 우왕의 친모를 궁인 한씨라고 한 것은 생모인 반야가 신돈의 비첩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우왕은 당시에 공민왕의 아들로 공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후 우왕은 반야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른바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우왕신씨설’을 내세운 이성계 일파에 폐위되고 죽임을 당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민왕 [恭愍王] - 고려 재건을 위해, 개혁을 단행하다 (인물한국사)


신돈

고려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강한 왕권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어. 그리고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권문세족들을 제거해야 하는 큰 숙제를 풀어야 했지. 공민왕은 이런 개혁을 함께해 줄 사람으로 신돈을 찾아냈어.

신돈은 권문세족과 거리가 먼 스님이었기 때문에 개혁에 적합한 인물이었지. 신돈의 어머니는 옥천사의 노비였다고 하는데, 노비 출신은 당시 스님이 될 수 없었던 풍습을 생각할 때, 이 이야기는 아마 사실이 아닐 거야.

공민왕과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이라는 관청을 만들고 스스로 판사가 되었어. 그럼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이었을까? 한자만 잘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 밭 전(田), 백성 민(民), 변할 변(變), 바를 정(正), 그리고 도감은 관청이라는 뜻이야. 억울하게 땅을 빼앗기거나 노비가 된 백성을 바르게 판단하여 토지는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농장의 노비는 양민으로 해방시켜 주는 관청이라는 뜻이야.

노비 신분에서 양인으로 해방된 사람들은 땅을 얻어 열심히 농사를 짓고, 그 수확을 왕에게 세금으로 바쳤어. 뿐만 아니라 군대에도 가기 때문에 왕권이 강해지게 되지. 반대로 권문세족들은 경제적인 기반을 잃어버리게 됐어. 백성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공민왕의 개혁 조치를 몹시 좋아했어. 신돈을 성인5)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까.

[네이버 지식백과] 공민왕 [恭愍王] -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파! (한국사 개념사전, 2010. 6. 4., (주)북이십일 아울북)

공민왕의 죽음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고려 공민왕 고려 우왕 A는 B의 아버지다
고려 충숙왕 고려 공민왕 A는 B의 어버이이다
명덕태후 고려 공민왕 A는 B의 어버이이다
노국대장공주 고려 공민왕 A는 B의 아내이다
고려 공민왕 신돈 A는 B와 관련있다
고려 공민왕 천산대렵도 A는 B를 저술하였다
고려 공민왕 노국대장공주진 A는 B를 저술하였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330년 고려 공민왕이 출생하였다.
1351년 고려 제 31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1374년 고려 공민왕이 사망하였다.

시각자료

영상

주석

  1. "공민왕", 『위키백과』online.

참고문헌

  • "공민왕", 『위키백과』online.
  • "공민왕",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