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
김만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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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김만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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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문신, 소설가 |
유형 | 인물 |
정의
1600(선조 33)∼1661(현종 2). 조선 중기의 문신·농학자.
내용
가족관계
조선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며, 충렬공(忠烈公)김익겸(金益謙)의 유복자이다. 또한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김만기(金萬基)의 아우로 숙종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숙부가 된다. 그의 어머니는 해남부원군(海南府院君) 윤두수(尹斗壽)의 4대손으로,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文翼公)윤방(尹昉)의 증손녀이고, 이조참판윤지(尹墀)의 딸인 해평 윤씨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광산(光山), 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지냈다. 정치적으로는 전형적인 서인에 속했다. 1671년(현종 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이듬해 겸문학(兼文學)·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나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작고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西人)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후 서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등용되어 1679년(숙종 5) 예조참의, 1683년(숙종 9)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대제학, 이듬해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있으면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들 창협(昌協)의 비위(非違)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으나 1688년 방환(放還)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 노도(櫓島)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구운몽》은 종전까지는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근래에 발견된 《서포연보(西浦年譜)》에 따르면 선천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 때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 1698년(숙종 24) 관직이 복구되고 1706년(숙종 32) 효행에 대해 정표(旌表)가 내려졌다. 저서에 《구운몽》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서포만필(西浦漫筆)》 《서포집(西浦集)》 《고시선(古詩選)》 등이 있다. [1]
주석
참고문헌
- 사료
- 서포만필(西浦漫筆)
- 서포문집(西浦文集)
[[분류:한글고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