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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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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7월 13일 (목) 10:4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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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王羲之)
파일:BHST Wangheeji.jpg
"왕희지", 『위키백과』.
대표명칭 왕희지
한자표기 王羲之
생몰년 303년-361년
이칭 왕우군(王右軍), 서성(書聖)
담재(澹斋)
일소(逸少)
출생지 진나라 저장 성 사오싱
사망지 진나라
국적 중국
유형 서예가



정의

중국의 동진(東晉)의 서예가.

내용

개요

왕희지(王羲之)는 중국 고금의 첫째가는 서성(書聖)[1]으로 불린다. 예서(隷書)를 잘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의 서체를 완성하였다.[2] 왕희지의 공적으로 인하여 글씨는 단순히 기록의 수단을 넘어 예술로서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3]

생애

왕희지는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인 낭야(琅琊)에서 회남태수(淮南太守)를 지낸 왕광(王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숙부 왕도(王導)는 동진(東晉) 왕조 건설의 일등공신이었고, 또 다른 숙부인 왕돈(王敦) 역시 당시 군권을 장악하고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4] 이러한 명문사족의 집안환경은 왕희지가 격조 높은 문예사조를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5]

16살 때 동진의 명신 치감의 눈에 들어 그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후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서풍을 배웠고, 한(漢)나라와·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하였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 궁중 도서관의 사무관에서 시작해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351년에는 우군장군(右軍將軍)[6] 및 회계의 내사(會稽內史)에 이르렀다. 하지만 처음부터 출세보다는 도(道)를 추구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원하는 마음이 강해 부임한지 4년만에 사임하였다.[7] 왕희지는 회계에 머물며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다가 5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품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蘭亭序)》,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유명하다. 또 송(宋)의 태종(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도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이 있다..[8]

난정서(蘭亭序)

난정서(蘭亭序)는 왕희지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힌다. 353년 3월 3일에 왕희지를 비롯한 동진의 명사들 41명은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제를 올리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모임을 가졌다. 이 때 참석자들이 지었던 시를 모아 책을 만들었는데 왕희지가 서문(序文)을 짓고 그 글씨를 손수 썼다. 이것이 바로 난정서(蘭亭序)이며 지금까지도 중국 서예의 최고 진품(珍品)으로 인정받고 있다.[9]

일화

왕희지와 거위

왕희지는 거위를 매우 좋아하였다. 왕희지는 붓글씨를 더욱 생동감 있고 힘차게 표현하기 위해 늘 거위가 물에서 헤엄치는 모양을 본떠서 손목을 단련했다고 한다.[10] 어느날 산음에 사는 한 도사가 좋은 거위를 기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는데 도사는 왕희지에게 『도덕경(道德經)』을 써주면 거위를 모두 주겠다고 하였다. 왕희지는 흔쾌히 써주고 거위를 모두 품에 안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 일화와 관련해 전해내려오는 이백(李白)의 《왕우군王右軍》이라는 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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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右軍 왕우군[11] 右軍本淸眞 왕희지는 타고난 본성이 청진하여 瀟灑出風塵 맑고 깨끗한 성정이 속세를 벗어났다네. 山陰遇羽客 산음에서 도사를 만나니 要此好鵝賓 거위를 좋아하는 손님 맞이하였네. 掃素寫道經 흰 비단에 도덕경을 쓰니 筆精妙入神 필법이 정묘하여 입신의 경지에 들었네. 書罷籠鵝去 글씨 다 쓰고 거위를 조롱에 넣고 가니 何曾別主人 어찌 일찍이 주인과 작별인사인들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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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왕희지의 필력

왕희지의 필력(筆力)은 매우 출중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진나라 황제가 북교(北郊, 지금의 베이징시 베이자오)에 제사를 드리러 갔을 때, 왕희지를 시켜 나무판 위에 제문을 쓰도록 한 다음 장인(匠人)을 보내 조각하도록 했다. 장인은 나무판을 한 층 한 층 깎아내서 왕희지 서법의 친필이 항상 보일 수 있도록 했는데, 세 번을 깎아내고 나서야 밑바닥이 보였다. 왕희지의 글씨가 나무판을 그렇게 깊게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장인은 왕희지의 필력의 기세와 힘에 매우 감탄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희지 [王羲之, wáng xī zhī] - 중국 최고의 서법가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왕희지와 탑비

=

어우.. 왕희지

주석

  1. 글씨를 빼어나게 잘쓰는 사람을 높여서 이르는말.
  2. "왕희지", 『두산백과』online.
  3. "왕희지王羲之 –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월간민화』online, 지디비주얼, 작성일: 2016년 8월 13일.
  4. "왕희지王羲之 –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월간민화』online, 지디비주얼, 작성일: 2016년 8월 13일.
  5. 李昇姸, 「王羲之의 道敎觀과 書藝」, 도교문화연구 제23집, 2005, 316쪽.
  6. 왕우군(王右軍)이라는 그의 별칭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7. 처음부터 회계에서 벼슬을 한 것도 이곳의 아름다운 산천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있다.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왕희지". 중국인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8. "왕희지", 『두산백과』online.
  9. "왕희지王羲之 –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월간민화』online, 지디비주얼, 작성일: 2016년 8월 13일.
  1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왕희지". 중국인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11. "왕희지王羲之 –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월간민화』online, 지디비주얼, 작성일: 2016년 8월 13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