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두리
족두리 (簇頭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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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족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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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簇頭里 |
이칭별칭 | 簇頭伊, 족두(足頭), 족관(簇冠), 죡도리 |
구분 | 수식 |
착용신분 | 왕실, 궁중, 평민 |
착용성별 | 여성 |
목차
정의
조선후기의 여성 예관이다.
내용
복식구성
착용신분
조선시대 왕실 및 반가 부녀자들이 착용 하였다.
착용상황
왕실과 궁중에서는 소례복과 상복에 착용 하였고, 반가와 서민들은 예복에 착용하였다.
형태
조선 전기(14~16세기)
앞이 낮고 뒤가 높으며, 옆면이 6~7쪽으로 나뉘고 정수리는 원형의 천 조각을 넓게 대어 편평하다.[1]
17세기
문헌에 ‘족두리’ 명칭 처음 등장한다. 옆면이 7개의 조각으로 구성, 둥근 정수리가 앞으로 기울어져 있다. 윗면이 85~95cm, 밑면이 61~69.5cm로 위에서 아래로 좁아지는 모양이다. 조선 전기처럼 머리 위에 완전히 쓸 수 있는 형태로 역대 시기별 가장 크다. [2]
18세기 이후
17세기에 비해 둘레가 확실이 줄어들었지만, 가장 우뚝 솟은 형태이다. 17세기는 중심이 앞으로 기울어졌다면, 18세기는 중심이 뒤쪽으로 이동 했다. 크기가 전체적으로 이전 시기에 비해 줄어들면서 정수리의 원도 줄어들어 복숭아 씨 모양의 형태이다. 조선시대에 가체금지령으로 인해 족두리가 권장된 이후, 현재까지도 혼례 시에 사용되고 있다. [3]
기타
어원
국문학계에서는 알타이어 계통의 순수 우리말인 족+두리의 합성어라고 밝히고 있다.
유래
조선시대 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56): 원나라에서 왕비에게 하사한 ‘고고리’가 와전되어 ‘족두리’가 변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4] 동시에 조선시대 학자 박규수(朴珪壽, 1807~1876): 원나라 사람들이 말이 죽으면 불쌍하게 여겨 그 말굽 모양을 취해 머리에 쓰는 족두(足兜)의 남겨진 형상에서 유래했다는 보는 견해가 있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왕비 | 족두리 | A는 B를 착용한다 | |
왕세자빈 | 족두리 | A는 B를 착용한다 | |
왕세손빈 | 족두리 | A는 B를 착용한다 | |
족두리 | 혼례 | A는 B에 착용한다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조반 부인[6]
영상
주석
- ↑ 金知娟, 「朝鮮時代 女性 禮冠에 관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102~104쪽.
- ↑ 金知娟, 「朝鮮時代 女性 禮冠에 관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104~106쪽.
- ↑ 金知娟, 「朝鮮時代 女性 禮冠에 관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107~111쪽.
- ↑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服食類」, ‘東國婦女首飾辨證說’, “『高麗史』元賜王妃古古里, 卽冠名傳於世, 則今簇頭里, 無乃古古里之音近而訛者歟.”
- ↑ 朴珪壽, 『居家雜服攷』, 「內服」, “按, 所謂娘子頭者, 旣在腦後, 則頂上空處, 乃有小戴, 非冠非帽, 正如脫取馬蹄而仰置之形, 俗名足兜, 未知創自何時, 或云, 亦是元俗也. 胡人本以鞍馬爲家馳逐爲生, 故馬死則憐之, 取其制而戴之, 足兜之形, 卽其遺象, 故因名足兜也.”
- ↑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
- 고미연, 「한국여성의 두식에 관한 연구-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 金知娟,「족두리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 이연화, 「족두리(簇頭里)의 형태 및 제작과정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세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 정영숙, 「조선시대 부인용 머리장신구 문양에 관한 고찰」, 석사학위논문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