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 (開城 靈通寺 大覺國師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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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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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城 靈通寺 大覺國師碑 |
주소 |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
문화재 지정번호 | 북한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155호 |
찬자 | 김부식(金富軾) |
서자 | 오언후(吳彦侯) |
각자 | 미상 |
서체 | 해서(楷書), 전서(篆書) |
승려 | 의천(義天) |
건립연대 | 1125년 |
목차
정의
황해북도 개성시 용흥리 영통사(靈通寺)에 있는 고려시대의 승려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의 탑비.
내용
개요
고려의 고승 대각국사 의천의 생애를 기리는 비이다.[1] 비신 높이 2.9m, 너비 1.56m이며, 귀부(龜趺)와 옥개석(屋蓋石)을 갖추고 있다.[2]
현재의 비문이나 전해지는 탁본에는 찬자, 서자, 각자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지만 후대의 자료들을 통하여 고려 중기의 대표적 정치가이자 문장가인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짓고, 오언후(吳彦侯)가 글씨를 쓴 것을 알 수 있다. 글씨를 새긴 사람은 확인되지 않는다.[3]
북한의 보물급 제36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55호로 변경되었다.[4]
비문
비문에는 어려서 불가에 들어간 대각국사가 송나라에서 천태종(天台宗)과 화엄종(華嚴宗)을 배우고 돌아와 천태종을 개창하기까지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5] 또한 음기(陰記)에는 대각국사비의 건립과정을 정리한 사적기(事跡記)와 대각국사 문도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6] 문도들은 약 200여 명으로 법계(法階)의 등급에 따라 나누어 기록되어 있으며, 본래 대각국사의 스승인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던 자와 대각국사의 제자를 구분하여 실었다.[7][8]
건립 과정과 비문 찬술 시기
비의 뒷면에 기록된 사적기에 의하면, 1101년 대각국사가 입적한 이후 영통사 동북쪽에 묘탑을 만들었고, 다음 해에 그 곳에 대각국사의 탑비를 세우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다. 1103년에는 국사의 원당(願堂)[9]인 경선원(敬先院)을 완성하였고, 이어서 대각국사의 탑비를 만들어 경선원 동쪽에 안치하였다. 하지만 8년 후인 1111년 탑비의 위치가 풍수에 좋지 않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이듬해에 영통사 남쪽으로 옮겨졌다.[10]
임오년(壬午年: 1102년) 오월에 지주사(知奏事)인 윤관(尹瓘)이 성지를 받들어 국사의 비를 영통사에 세우도록 허락을 받았다. 갑신년(甲申年: 1104년)에 이르러 숙종이 경선원(敬先院)을 건축하기 시작하고, 태사령인 최자호와 춘관정 전간에게 명하여 터를 잡았다. ...(중략)... 8년을 지난 이후 신묘년(辛卯年: 1111년)에 이르러 성주(省奏: 왕에게 건의서를 올리는 것.)하되, “대각국사의 비가 영통사 서북쪽 근맥(根脈)에 있는데 지세가 불편하니 마땅히 다른 곳으로” (결락) 원충(元忠) 춘관정인 전간이 영통사에 와서 문도인 명공(名公)과 더불어 터를 잡아 식당(食堂)을 지었으니, 남랑외(南廊外)의 평지가 바로 이 지대이다. 명년(明年: 1112년) 2월에 이 흥왕사 대중 1,670명이 화사(畵師) 박근(朴瑾)은 비석의 사방곽연(四方廓緣)에 문양을 그리고, 석장은 교위(校尉)인 임단(林旦)이 새겨서 12월 20일에 완공하였다. | ||
출처: 이지관,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166-168쪽. |
사적기의 기록과는 달리, 비문 내용 중에는 당시 국왕인 인종(仁宗)의 명령으로 비문을 지었다는 내용이 나오고, 비석에 기록된 김부식의 직위는 1133년 경의 것으로 확인된다. 처음 건립될 당시의 비석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인종 때에 기존의 비를 대체하여 다시 세운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11]
인종 임금께서 왕위를 이은 지 4년째인 을사년(乙巳年: 1125년) 가을 7월 경오일에 아울러 전액(篆額)까지 내렸다. 대각국사 문인인 도승통(都僧統) 징엄(澄儼) 등이 국사의 행장(行狀)을 임금께 올려 고하기를 우리 선사(先師)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아직 비명(碑銘)이 저술되지 않아서 항상 그의 위대하신 덕업(德業)이 마멸된 바가 있어서 기록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오니, 오직 임금께서는 이 일을 통찰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비문을 지어 미래에 구원(久遠)토록 전시(傳示)되게 하여 달라고 건의하였다. | ||
출처: 이지관,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137-138쪽. |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대각국사 의천의 생애를 기리는 탑비는 영통사에서 발견된 것 외에 칠곡 선봉사(僊鳳寺)에서 발견된 탑비가 있다.
선봉사 대각국사비는 대각국사가 천태종을 수립한 시조임을 밝히기 위해 세운 것이고, 영통사의 것은 증시(贈諡: 임금이 신하에게 시호를 내려주던 일)를 위해 세운 것이다.[12] 한 사람의 승려에 대하여 두 개의 비가 전해지는 것은 대각국사의 종교적 관심과 활동이 다른 승려들과 달리 서로 다른 두 개의 종파에 걸쳐있었기 때문으로, 현재 전하는 비도 각기 원래 대각국사가 출가하고 활동한 교단인 화엄종과 그가 개창한 천태종의 문도들이 각기 건립한 것이다.[13] 따라서 비의 건립 주체에 따라 비문의 내용이 어떻게 다른 지를 살펴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자료이다.[14]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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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 | 의천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 의천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 | 개성 영통사 | A는 B에 있다 | |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 | 김부식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 | 오언후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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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년 |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를 기리기 위하여 영통사(靈通寺)에 대각국사비가 건립되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 ↑ 김응현, "영통사 대각국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04월 06일. - ↑ 최연식, 『한국금석문집성 23: 고려7 비문7』, 한국국학진흥원, 2014, 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3", 한국금석문집성 23: 고려7 비문7,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 "영통사 대각국사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영통사 대각국사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최연식, 『한국금석문집성 23: 고려7 비문7』, 한국국학진흥원, 2014, 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3", 한국금석문집성 23: 고려7 비문7,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 최연식, 『한국금석문집성 23: 고려7 비문7』, 한국국학진흥원, 2014, 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3", 한국금석문집성 23: 고려7 비문7,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 ↑ 죽은 사람의 진영(眞影)과 위패(位牌)를 모시고 원주(願主)의 명복을 기원하던 법당(法堂).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 온라인 참조: "원당", 한국고전용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최연식, 『한국금석문집성 23: 고려7 비문7』, 한국국학진흥원, 2014, 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3", 한국금석문집성 23: 고려7 비문7,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 최연식, 『한국금석문집성 23: 고려7 비문7』, 한국국학진흥원, 2014, 6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3", 한국금석문집성 23: 고려7 비문7,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 "칠곡 선봉사 대각 국사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최연식, "대각국사비의 건립과정에 대한 새로운 고찰", 『한국사연구』 83, 한국사연구회, 1993, 39쪽.
- ↑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사진출처: "영통사 대각국사비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 ↑ 사진출처: "대각국사 묘지석",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참고문헌
- 최연식, "대각국사비의 건립과정에 대한 새로운 고찰", 『한국사연구』 83, 한국사연구회, 1993.
- 김응현, "영통사 대각국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04월 06일. -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최연식, 『한국금석문집성 23: 고려7 비문7』, 한국국학진흥원, 2014, 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3", 한국금석문집성 23: 고려7 비문7,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영통사 대각국사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영통사대각국사비", 조선향토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칠곡 선봉사 대각 국사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