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정씨 우복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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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6월 15일 (목) 15:4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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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씨 우복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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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진주정씨 우복종택
유형 주택(한옥)


정의

진주정씨 우복가문의 종택이다.

정의

진주정씨 우복가문의 종택이다.

내용

우복종택의 구조

현재 우복종택은 조선 영조가 우복 정경세(1563~1633)선생의 덕을 기려 하사한 땅에 5세손 정주원이 175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이다. 우산동천 좌측편 넓은 산등성의 중턱에 동향으로 앉아 있다. 1988년에 복원한 5칸 대문채 가운데 나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편에 사랑채 · 안채 · 행랑채가 "튼 ㅁ"자를 이루면서 앉아있고 그 뒷편 오른쪽에 우복 정경세 선생을 모신 불천위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는 앞쪽에 네벌대 석축을 쌓고 뒤로 조금 물린 곳에 다시 네벌대 기단을 축조하여 앉혔기 때문에 이색적으로 높다. 사랑채에서 대문채 너머 뛰어난 경관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어 『산수헌』이라 했다. 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우복종가의 상주 입향

우복가문이 진주의 세거지를 떠나 상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우복의 8대조 정의생(鄭義生) 때로서 시기적으로는 대략 1300년대 중반 경에 해당한다. 『晋州鄭氏族譜』와 『商山志』 등에 따르면 정의생은 상주목사로 부임한 아버지 정택(鄭擇)을 배행하는 과정에서 당시 상주의 강력한 토착세력이던 商山金氏 김덕제(金德齊)의 딸과 혼인하게 되엇고 남부녀자혼의 관행에 따라 상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진주정씨 일문이 형성될 수 있었고 그 직접적인 계기는 정택의 사환에 따른 정의생의 혼맥이었다. 상주 진주정씨의 보첩류에서는 정택을 1世, 정의생을 2世로 기록하여 상주입향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후 정의생과 그의 자손들은 한동안 고관이나 석학을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정의생과 아들 장효옹은 부사, 손자 정걸은 호군, 중손 정극공은 창신교위를 지내는 등 비록 중하급의 관직이나마 사환이 지속되었다. 이는 진주정씨가 처향에 입향한 이후 사회적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진주정씨의 상주입향과 향후 발전에 정의생의 처가 상산김씨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상산김씨는 상주의 대표적인 토성으로서 진주정씨와 통혼 당시에 관직, 훈공 등을 통해 문호가 극대화되어 있었다. 상산김씨는 당대 유수의 사환가문이었고 정의생은 상산김씨와의 통혼 이후 한동안 처가의 사회, 경제적 기반 위에서 세거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을 확증할만한 문헌기록은 없으나 남귀여가혼, 자녀균분상속 등 당시 혼인과 상속의 ㅎㅇ태를 고려한ㄷ면 정의생은 처부 김득제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1]

우복종택의 이전

진주정씨는 정의생의 현손 정번(鄭蕃) 대에 이르러 거주지를 이전하게 되었다. 현재정의생이 김득제의 사위가 된 이후 상주 어디에 정착했는지는 미상이지만 정경세의 손자 정도웅이 작성한 『晋州鄭氏家』에 따르면 정의셍~정극공(鄭克恭)까지의 4대는 상주의 서산 아래 상신전촌(上新田村)에 거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후 15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정극공의 아들 정번이 종래의 세거지에서 역시 상주목 관할의 율리로 이거하였는데 이는 상주입향 이후 4대만에 이루어진 괄목할만한 변화로서 상산김씨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독자적인 문호를 형성할만한 제반 여건이 조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전에 따르면 정번은 아버지 정극공의 산소를 상주 청남(지금의 功城面)의 명현(椧峴)에 마련하였는데 이 터는 와우형(臥牛形)으로 불리는 명당이었다. 당시 지관이 이 터를 점지해 준 다음 북쪽으로 이거하면 후손 중에 현달한 인물이 배출될 것이라 하여 율리로 이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2]

우복 정경세

진주정씨는 정계함을 기점으로 문학, 학문, 과거를 통해 서서히 발신해 나갔다. 정계함은 문재가 있어 김원, 김충 등의 문사들과 교유하였고 그 아들 정은성, 대성, 국성 3형제 역시 유망이 있었으며 서당을 건립하여 일대의 학문적 분위기를 진작시켰다. 특히 정대성, 정국성은 상주입향 이후 최초의 사마시 합격자가 되었으며 이 중에서도 정국성은 학행이 있어 사준참봉에 임명되기도 했다. 정은성의 아들 정여관은 숙부 정대성에게 수학하여 역시 문예가 숙성하여 정계함-정은성대성국성-정여관으로 이어지는 진양정씨 3세문행의 한사람으로 칭송되었다.
바로 이러한 토대 위에서 진주정씨는 입향 이래 300년만에 걸출한 학자, 관료인 정경세를 배출하게 되었다. 정경세는 유성룡의 고제로서 이황-류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영남학통의 적전으로 인식된 인물이었다. 그는 주자학 전반에 조예가 깊었지만 특히 예학에 정통하였으며 영남남인으로서는 드물게 인조조에 이조판서에 올라 일국의 전형을 담당하고 양관대제학으로서 한 시대의 문병(文柄)을 잡았던 매우 현달한 인물이었다. 상주 진주정씨 일문에서 차지하는 정경세의 비중은 실로 막대하다. 정의생-정여관에 이른 8대가 진저장씨가 점진적인 성장기였다면 정경세는 자신의 학문적, 정치적 현달을 통해 가격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 가문의 현조요 기가조였다. 후일 그의 자손들이 영남학파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것도 정경세의 위상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현재 우복종택에서 소장된 전적류의 시기적 상한도 정경세가 활동하던 16세기 중후반이며 선대의 장갈류 역시 대부분 정경세로 인해 작 성된 것들이다. [3]

우산으로 이거

우복 종택은 1750년 전후에 정주원의 주도 하에 8대를 세거했던 율리를 떠나 우산이거를 단행하였다. 우산으로 이거한 일차적인 배경은 우산에 정경세가 마련한 전답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정경세가 지은 서원이 있었는데 정경세와 그 자손들은 우산을 자주 왕래하며 이 곳 서실을 독서처로 이용해 왔다. 또한 영조가 정경세의 학덕과 종사에 미친 공적을 치하하여 우산 일대를 우복가문의 사패지로 내렸는데 그 토지의 규모가 동서로 2kxm 남북으로 4km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정주원은 산장 주변의 방대한 토지를 하사받으면서 우산으로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우복가문은 율리의 동종들과 떨어져 우산에서 새로이 종문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현재의 우복종택도 이 때 지어진 건물이다. [4]

우복 종택 소장 고서와 고문서

정재봉은 선대의 문적을 유지, 보존하는 데 성혈을 다하는 한편 한국학 연구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일체의 가문 소장 전적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여하였다.[5]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서들은 1948년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대부분의 전적을 이 때 소실하게 되었으며 현대로서는 화재시에 어느 정도의 전적이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복 종택에는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전적이 남아 있으며 종택에 소장된 고문서와 고서는 조선 후기 향촌사회사, 유학사는 물론 고문헌학, 서지학 연구에 있어 커다란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진주정씨 우복종택 || 진주정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정의생 || 상주 || A는 B에 입향하였다 || 1300년 김득제 || 정의생의 처 || A는 B의 어버이이다 ||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진주정시 우복종택 정경세 A는 B에서 이름을 땄다
정택 정의생 A는 B의 어버이이다
정택 진주정씨 우복종택 A는 B를 건립하였다
정의생 정의생의 처 A는 B의 남편이다
정번 정의생 A는 B의 후손이다
정번 진주정씨 우복종택 A는 B를 이건하였다 1500년 전후 = 정경세 정번 A는 B의 후손이다
정주원 정경세 A는 B의 후손이다
정주원 진주정씨 우복종택 A는 B를 이건하였다 1750년 전후

시간 정보

시간정보 내용
1300년대 정택정의생을 필두로 한 진주정씨 우복종가가 상주로 입향하였다.
1500년 전후 정번이 율리로 종택을 이건하였다
1750년 전후 정주원이 종가를 우산으로 이건하였다.
1946년 종택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문건의 절반 이상이 소실되었다

공간 정보

위도 경도 내용
36.475327 128.061774 경상북도 상주시 의서면에 틀:PAGENAGE이 있다

주석

<reference/>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69-271쪽.
  2.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1쪽.
  3.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2-3쪽.
  4.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9-281쪽.
  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87쪽.
  6.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3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