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堤川 月光寺址 圓朗禪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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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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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for Master Wonrang from Wolgwangsa Temple Site, Jecheon |
한자 | 堤川 月光寺址 圓朗禪師塔碑] |
주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 서빙고로 137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360호 |
문화재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찬자 | 김영(金穎) |
서자 | 순몽(淳夢) |
각자 | 진윤(眞胤) |
서체 | 해서(楷書) |
승려 | 대통(大通) |
건립연대 | 8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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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월광사지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승려 원랑선사 대통(圓朗禪師 大通, 816-883)의 탑비.
내용
개요
이 비는 본래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월광사터에 세웠던 것으로 1922년 3월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1]
비의 전체 높이는 3.95m이고, 비신의 높이 2.26m, 폭 0.97m이다.[2]
상단부 글자의 마멸이 비교적 심한 편이고, 전체적으로도 눈으로 글자를 판독하기 곤란하다.[3]
대통(大通)은 월광사(月光寺)에 머무르면서 사찰을 크게 발전시키다가 883년(헌강왕(憲康王) 9)에 입적하였다. 탑비는 890년(진성여왕 4)에 건립되었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문신인 김영(金穎)이 짓고, 글씨는 승려 순몽(淳夢)이 썼으며, 글자는 제자인 진윤(眞胤) 등이 새겼다.[4]
보물 제360호. 전체 높이 3.95m, 비신 높이 2.26m, 너비 97㎝, 두께 24㎝.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동창리 월광사지에 있던 것을 1922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놓았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비 형식을 따랐으며, 전체적인 비례가 잘 조화된 단아한 조형이다. 890년(진성여왕 4)에 건립되었다.
비의 주인공인 원랑선사는 856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11년간 명산을 편력하고 귀국한 뒤, 월광사에 머무르면서 선문(禪門)을 빛나게 하였다. 68세로 입적하자 헌강왕은 ‘원랑선사’라 추시(追諡: 죽은 후에 시호를 내림)하고 ‘대보광선(大寶光禪)’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비문은 문신인 김영(金穎)이 짓고 글씨는 승려 서예가 순몽(淳蒙)이 썼는데, 계선(界線) 안에 2㎝ 정도로 쓴 구양순(歐陽詢)체의 해서이다. 현재 월광사 터에는 탑의 부재 일부만 남아 있다.-민백
비문
비문에서 원랑선사(圓朗禪師)가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위앙종(潙仰宗) 계통의 선을 수학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선사의 스승인 낭혜화상(朗慧和尙) 이 마조(馬祖) 도일(道一) 계통의 선을 공부한 사실과 더불어 신라 하대 선종사상의 학풍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5]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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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 국립중앙박물관 | A는 B에 있다 | |
헌강왕 |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 A는 B의 이름을 지었다 | |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 대통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 김영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 순몽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 진윤 |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 ↑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 ↑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 ↑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 ↑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