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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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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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이칭 |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
주소 |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
문화재 지정번호 | 국보 제47호 |
문화재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
찬자 | 최치원(崔致遠) |
서자 | 최치원(崔致遠) |
각자 | 환영(奐榮) |
서체 | 전서(篆書) |
승려 | 혜소(慧昭) |
건립연대 | 88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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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雙磎寺)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진감선사 혜소(眞鑑禪師 慧昭, 774-850)의 탑비.
내용
개요
이 비는 전체높이 3.63m, 비신높이 2.13m, 너비 1.035m, 두께 22.5㎝ 이다. 헌강왕의 명령으로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으며, 환영(奐榮)이 글씨를 새겼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이다.[1]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및 탑신이 완전한 탑비로,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탑비 양식에 따라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되었으며, 귀부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龜甲文)이 크고 간편하게 조식되어 있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海東故眞鑑禪師碑)’라는 전액(篆額)이 양각되었으며, 그 위로 보주와 반룡(蟠龍: 승천하지 아니한 용)을 얹었다.[2][3]
이 탑비의 비문은 건립 연대를 알 수 있는 비면 부분이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1725년(영조 1)에 목판에 그대로 본떠 새긴 비문이 있어 887년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글씨는 2cm 정도의 해서(楷書)로 위아래로 긴 짜임새를 하고 있다.[4] 1936년 7월 지진으로 인하여 비의 일부가 일부 훼손되었다.[5] 1962년 국보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문
진감선사 혜소(慧昭)는 최씨로 804년(애장왕 5) 세공사(歲貢使)의 배에 편승하여 당나라의 신감대사(神監大師)에 의하여 중이 되었고, 각지를 편력한 뒤 830년(흥덕왕 5) 귀국하여 역대왕들의 숭앙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문을 짓고 쓴 이는 당대의 대표적 문인인 최치원(崔致遠)으로, 특히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6]
비문의 내용은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 : 774~850)의 입당 구법 과정과 830년 귀국 이후 지리산 화개곡에서 선법을 펼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비의 서문에 유교와 불교사상이 근본은 다르지 않다고 하고, 본 내용에서도 노장사상을 보여주는 용어와 개념들을 다수 사용하여 삼교를 하나로 파악하는 찬자 최치원의 사상적 입장과 아울러 당시 지식인들의 사상 경향을 시사해 준다. 아울러 쌍계사의 유래, 범패의 전래와 유포, 효소왕(孝昭王)의 피휘사실 등도 전하고 있다.
비문은 크게 서문과 그 내용을 정리한 명으로 나누어진다. 서문의 서론격인 도입부는 혜소의 선종 사상이 갖는 경향을 최치원이 파악하고 그 의미를 밝힌 것이다. 여기서 최치원은 유교·불교 사상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본 내용에서도 노장 사상이 드러나는 용어와 개념들을 다수 사용하여 삼교가 표방하는 이치는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하나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를 통해 최치원은 진감선사가 그러한 경지에 있는 뛰어난 인물임을 부각하였다.
본론 부분은 진감선사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기록하였다. 진감 선사는 810년(헌강왕 2) 숭산(崇山) 소림사(小林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다시 종남산에 들어가 3년간 더 도를 닦았다. 830년(흥덕왕 5)에 귀국하여 상주 모악산 장백사에서 선을 가르쳤다.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민애왕이 혜소라 시호를 내리고, 가르침을 구하고자 서울[경주]로 거듭 초빙하였으나 거절하고 가지 않았다.
지리산 화개곡에 들어가 삼법 화상(三法和尙)의 유지(遺址)에 절을 세우고 선(禪) 사상을 가르쳤으며, 다시 남쪽의 넓은 벌판으로 옮긴 뒤 옥천사(玉泉寺)를 세웠다. 850년(문성왕 12) 나이 76세, 법랍 41세로 입적하였다. 아울러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친 유래, 범패의 전래와 유포, 효소왕(孝昭王)의 피휘 사실과 탑비의 건립 과정 등도 전하고 있다.
현황 [네이버 지식백과]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河東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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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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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진감선사 혜소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하동 쌍계사 | A는 B에 있다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최치원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887년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최치원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887년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환영 |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사산비명 | A는 B에 포함된다 | |
헌강왕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A는 B의 이름을 지었다 | 887년 |
시각자료
가상현실
- 차후 있을 답사 후 보완..
갤러리
영상
- [주요 뉴스] KBS뉴스9 경남 – 지진 시대, 문화재 보호 `고심`(2016.10.11.화)
주석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문화재 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쌍계사 진감선사비명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 ↑ " 稀有(희유)의 珍事實(진사실) 被害六日(피해육일)만에判明(판명)",『동아일보』, 작성일: 1936년 7월 11일.
- ↑ 김세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쌍계사 진감선사비명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 ↑ "쌍계사 진감선사비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참고문헌
-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27-152쪽.
-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이른아침, 2014, 188-214쪽.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문화재 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쌍계사 진감선사비명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 "稀有(희유)의 珍事實(진사실) 被害六日(피해육일)만에判明(판명)",『동아일보』, 작성일: 1936년 7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