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求禮 鷰谷寺 玄覺禪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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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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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for Master Hyeongak at Yeongoksa Temple, Gurye |
한자 | 求禮 鷰谷寺 玄覺禪師塔碑 |
주소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1017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152호 |
문화재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찬자 | 왕융(王融) |
서자 | 장신원(張信元) |
각자 | 미상 |
서체 | 해서(楷書) |
승려 | 현각선사(玄覺禪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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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연곡사(鷰谷寺)에 있는 고려시대 승려 현각선사(玄覺禪師)의 탑비.
내용
개요
고려 전기의 승려 현각선사(玄覺禪師)를 기리기 위해 979년(경종 4)에 건립되었다.[1] 임진왜란 당시 비의 몸체가 없어져 현재는 귀부(龜趺)[2] 와 이수(螭首)[3]만이 남아 있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玄覺王師碑銘(현각왕사비명)’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 비의 주인이 현각선사임을 알 수 있다.[4]
기록이나 옛 탁본에 의하면 비문은 왕융(王融)이 지었고, 장신원(張信元)이 썼다고 전한다. 글씨는 2㎝ 정도의 해서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바탕으로 하면서 자형을 바르게 하였다. -민백
비를 받치고 있는 돌거북은 부리부리한 두 눈과 큼직한 입이 웅장하며, 수염을 가진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에는 안상과 꽃조각이 새겨져 있다. 받침돌 위에 놓여 있는 비의 머릿돌에는 여러 마리의 용의 서로 얽힌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긴밀하고 사실성이 두드러진다. -컬쳐
비는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손상을 입은 것이 풍화로 파손이 되고, 그 뒤에는 구한말에 의병항쟁 때 일본군의 방화와 약탈 등으로 더 손상이 된 것을, 1970년에 떨어진 조각들을 모아 붙여 놓았다고 한다. -일본의만행
한국전쟁 때 생긴 피탄 자국이 받침돌과 머릿돌 뒷부분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으며, 현재의 탑비는 귀부의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이 조각난 것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구례여행
비문
전라남도 구례군 연곡사에 있는 고려초 선사 현각선사의 비. 현재 비는 조각만 남아 있고 146자만 남은 비문의 탁본 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보물 제152호로 지정되었다.-금석문
기록에 의하면 비문은 학사 왕융이 지었고, 글씨는 상주국 장신원이 썼다고 한다.-컬쳐
사라진 비의 몸돌에는 현각선사의 일대기를 적었는데, 비문은 학사 왕융이 짓고, 장신원이 글을 썼다고 한다.-일본의만행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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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 A는 B에 있다 | ||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 A는 B의 이름을 지었다 | ||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 ||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 A는 B와 관련있다 |
시각자료
영상
- the 9594, "연곡사 현각선사 탑비 보물 제152호", YouTube, 게시일: 2015년 11월 18일.
- OPEN TV, "(3D 입체영상)구례 연곡사 권역", YouTube, 게시일: 2016년 02월 08일.
주석
- ↑ 정충락,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귀부(龜趺)",
『두산백과』online . - ↑ 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 "이수(螭首)",
『두산백과』online . - ↑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