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령
직령 (直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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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직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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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直領 |
착용신분 | 왕, 왕세자, 왕세손, 문무백관 |
착용성별 | 남성 |
목차
정의
고려 말과 조선시대 남자의 포로 관례복이었으며 출입시 상복(常服)이었다.[1]
내용
복식구성
착용신분
착용상황
의례용이나 외출시, 평상복[편복]으로 착용하였는데, 외출시나 의례용으로 착용 할 때는 갓을 썼고 그 외에는 다양한 편복용 관모(정자관, 사방건 등)를 썼다.
형태
깃은 곧고 소매가 넓으며 뒷자락이 이중으로 된 형태이다. 무와 등바대에 연결된 자락은 뒷중심이 터져 있어 활동이 편리하며 뒷길과 연결된 자락이 터진 부분을 가려주어 말을 탈 때 하의(下衣)가 보이지 않게 한다.[2]
기타
고려 우왕 13년(1387) 6월 명의 제도에 의거하여 관복을 개정할 때 직령을 착용할 수 있었던 계급은 서민과 천민 등 하층계급이어싿. 그러나 고려 말 대제학을 지낸 이조년(1260~1343년)의 아들 이포의 영정을 보면 머리에 발립을 쓰고 홍색 직령에 사대를 띠고 화를 신은 것으로 보아 당시 상류계급에도 이미 직령이 입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말에서 조선 말기까지 서민부터 왕까지 두루 착용했던 직령은 세조때 연거복, 명종 때 소현세자, 선조 때 동궁의 서연복, 인조, 숙종, 고종 때 세자 관례복, 사대부의 연거복, 선비의 사복, 출입복, 무관의 상복으로 착용되었다. 고종 21년과 31년의 사복걔혁령에 의해 다른 소매 넓은 포와 함께 폐지되었으나 순종은 세자 관례복으로 입었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별감, 향리 소친시의 상복 또는 상복으로도 입혀졌다. 직령의 형태는 옷깃이 곧은 깃인 점만 단령과 다르고 거의 같은 형태의 옷이다. 따라서 무의 형태 변화는 단령이나 답호와 거의 같은 양식으로 변화되었다. 초기에는 착수에 옷깃은 좁은 목판깃이고 무는 여러번 접은 형태이며 옆이 트였다. 중기에는 옷깃은 칼깃이고 소매가 넓어졌고, 무는 직사각형의 형태를 사다리꼴로 접은
모습으로 바뀌었으며 후기에는 무를 뒤로 젖혀 입었다. 말기에는 깃 궁둥이가 완만한 형태의 둥그레깃이며, 소매 넓이는 넓고, 무는 완전히 뒤로 젖혀 길에 무의 위쪽을 꿰매고 고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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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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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령 | 왕 | A는 B를 착용하였다 |
직령 | 왕세자 | A는 B를 착용하였다 |
직령 | 왕세손 | A는 B를 착용하였다 |
직령 | 갓 | A는 B에 착용한다 |
직령 | 의궤 |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 ↑ 강순제·김미자·김정호·백영자·이은주·조우현·조효숙·홍나영, 『한국복식사전』, 민속원, 2015, 661쪽.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153쪽.
- ↑ 강순제·김미자·김정호·백영자·이은주·조우현·조효숙·홍나영, 『한국복식사전』, 민속원, 2015, 661~6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