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청도 운문사 작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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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샘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5월 26일 (금) 16:1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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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운문사 작압전
(淸道 雲門寺 鵲鴨殿)
답사 이후 추가 예정
대표명칭 청도 운문사 작압전
영문명칭 Jagapjeon Hall of Unmunsa Temple, Cheongdo
한자 淸道 雲門寺 鵲鴨殿
주소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소유자 청도 운문사
관리자 청도 운문사
건립시대 조선시대
관련승려 보양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위치한 운문사 안의 법당.

내용

작압전(鵲鴨展)은 보양(寶壤)이 초창하고 학일(學一)이 제2 중창을 할 때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후 재건되었다. 작압전에는 보물 제317호로 지정된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淸道 雲門寺 石造 如來 坐像)이 모셔져 있는데, 조성 연대는 신라 후기로 추정하고 있다.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 옆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1]으로 사천왕(四天王)이 모셔져 있다.[2]

운문사는 창건 당시 작갑사였던 것이다. 중창을 했던 보양국사가 작갑사의 옛터를 찾기 위해 현 북대암에 올라가서 살필 때 찬란한 빛을 발하는 황금탑 주위에 까치 떼가 모여든 것을 보고 작갑사의 옛터를 찾게 된다. 까치 떼들의 도움으로 작갑사를 중창하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까치 작(鵲)자에 오리 압(鴨)자를 써서 작압전을 짓고 작압사라 불렀으며 고려 태조가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내리면서(937년) 이때부터 운문사라 불렸고 호거산도 운문산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3]

보양스님이 절터를 잡기 위해 북쪽 산마루에 올랐을 때 보았다는 오층황탑은 무엇이었을까? 또 까치가 알려주어 찾아낸 벽돌로 쌓았다는 탑은 어떻게 된 걸까? 『삼국유사』 「보양이목」에는 “후삼국이 어지러울 때 대작갑·대비갑·소보갑·천문갑·가슬갑 등 오갑사가 모두 망하고 무너져 오갑사의 기둥을 대작갑에 모아두었다”는 구절이 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앞뒤 사정을 추측해보면 대작갑사 시절 담황색 벽돌로 쌓았거나 아니면 탑의 윗부분을 금빛 또는 구릿빛 나는 무엇으로 장식한 오층전탑이나 모전석탑이 있었으나 이것이 어느 땐가 절과 함께 무너져버렸고, 보양스님이 그 터에 절을 지을 때 버려진 탑재를 수습하여 다시 쌓았으며, 남은 벽돌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로 미루어 그 탑 또한 5층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운문사에는 오층전탑이나 모전석탑은커녕 이와 비슷한 유물도 없다. 그러면 이 탑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모습은 전혀 엉뚱하지만 작압전이 바로 오층탑의 후신이다. 지금의 작압전은 1941년에 지어졌다.


Quote-left.png 신라시대 이래로 청도군의 사원 작갑사(鵲岬寺) 이하 중소 사원은 삼한의 병란 중에 대작갑(大鵲岬), 소작갑(小鵲岬), 소보갑(所寶岬), 천문갑(天門岬), 가서갑(嘉西岬) 등 5갑이 모두 훼손되어 5갑의 기둥만 모아 대작갑사에 두었다. Quote-right.png
출처: 『삼국유사』 권 제4, 제5 의해, 「보양이목」.[4]


보양스님이 복원하여 운문사의 뜰 가운데 서 있던 대작갑사의 오층전탑 혹은 모전석탑이 1718년 이전 일부는 무너지고 일부만 남아 환작대라고 불리다가, 그뒤 다시 목조건축과 탑의 혼합형 건축인 작압전으로 변하였고 1941년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탑의 자취마저 잃고 자리까지 바뀐 채 지금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목조건물로 변해버린 것이다.[5]

작압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또 언제일까? 그것은 작압전의 편액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사진을 살펴보면 지금의 작압전 편액이 바로 사진 속의 편액임을 알 수 있는데, 이 편액의 오른쪽에 “庚戌 八月 日”(경술 팔월 일)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일반적으로 건물이 완성된 직후 편액을 걸게 된다. 따라서 작압전은 1718년과 1941년 사이에 드는 경술년, 곧 1730년, 1790년, 1850년, 1910년 중 어느 한 해에 지어졌다고 말할 수 있으나 더 이상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운문사의 내력으로 보아 ‘작갑’이 옳을 텐데 ‘작압’으로 바뀐 이유가 무엇인지도 의문스럽다. 요컨대 보양스님이 복원하여 운문사의 뜰 가운데 서 있던 대작갑사의 오층전탑 혹은 모전석탑이 1718년 이전 일부는 무너지고 일부만 남아 환작대라고 불리다가, 그뒤 다시 목조건축과 탑의 혼합형 건축인 작압전으로 변하였고 1941년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탑의 자취마저 잃고 자리까지 바뀐 채 지금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목조건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작압전 작은 법당에는 운문사가 부침해온 역사가 압축되어 담겨 있고, 우리가 대하는 한 유물이 처음 모습과 얼마나 달라질 수 있고 또 상상이 미치지 않을 정도로 달라져도 얼마나 끈질기게 애초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운문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초판 1997., 11쇄 2009., 돌베개)

운문사 작압전 출토 사리 석탑 호명(雲門寺 鵲鴨殿 出土 舍利 石塔 壺銘)

운문사 작압전 해체 복원 당시 발견된 사리석함과 사리구가 있다. 1941년 작압전을 해체 복원 이건할 당시 그곳에 봉안되어 있던 석불 좌상의 대좌 밑에서 수습된 사리 석함과 사리구로 함통 6년명(咸通 6年銘)[865]이 새겨져 있었다. 이를 통해 작압전이 건립되기 전 이곳에 위치했던 전탑의 건립 연대를 9세기로 편년할 수 있게 되었다.[6]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청도 운문사 작압전 청도 운문사 A는 B에 있다
청도 운문사 석조여래좌상 청도 운문사 작압전 A는 B에 있다
청도 운문사 사천왕 석주 청도 운문사 작압전 A는 B에 있다
보양 청도 운문사 작압전 A는 B를 건립하였다 930년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불교를 수호하는 선신(善神). "호법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진관스님,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영남이공대 교수, "사천왕을 따로 모신 청도 운문사 작압전", 『경북매일』online.
  4. "보양 관련 기록(0943년 01월 (음)", 『삼국유사』 권 제4, 제5 의해, 「보양이목」,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 참조: "운문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6. 진관스님, "운문사 작압전 출토 사리 석탑 호명",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사진출처: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 참조: "운문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8. 사진출처: 山河 탐방 골수분자, "청도 운문사 사리암 탐방.", 『네이버 블로그 - 德田의 문화일기.』online, 작성일: 2008년 01월 14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