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정의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寶林寺)의 주불.
내용
좌상의 높이는 2.51m, 무릎 너비 1.97m이다. 보림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제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는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다.[1]
조성 관련 기록
보림사의 이 철조비로자나불은 왼쪽 팔 부분에 명문이 있어 조성 연대와 배경을 파악할 수 있다.
858년에 김수종이 왕의 허락을 받아 불상을 조성했다는 이 명문을 통해, 신라 하대(下代)에는 중앙의 지원 없이 지방 유지가 개인 재산을 들여 불상을 조성할 정도로 선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2]
불상을 조성한 때는 석가여래 입멸 후 1808년이다. 이때는 정왕 즉위 3년이다. 대중 12년(헌안왕 2, 858) 무인 7월 17일 무주 장사현 부관 김수종이 진주하여, 정왕(情王)은 8월 22일 칙령을 내렸는데 ▨ 몸소 지으시고도 피곤함을 알지 못하셨다. | ||
출처: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조상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국립문화재연구소. 2017년 02월 20일 확인. |
그런데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에는 860년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사재를 들여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주성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위의 두 기록에서 나타나는 차이로 인해, 불상을 만들어 보림사에 봉헌한 인물이 누구이냐에 대해서 두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전임 장사부수 김수종이 858년에 발원하여 철불 주조 불사를 시작한 것을 후임 장사부수인 김언경이 860년에 마무리지으면서 김언경이 자기 공덕을 과시하기 위해 고의로 그 공을 가로챘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3] 활동년대와 한 일의 내용으로 보아 김수종과 김언경은 같은 사람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후자의 경우, 불상과 비문에 적힌 조성년대가 각각 다른 것은, 858년은 철불을 부어 만들 거푸집을 만들면서 새긴 연도이고 이 거푸집을 만드는 데 1년이 걸렸으며 철불을 완성해서 봉안한 것이 860년이라고 설명한다.[4]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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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장흥 보림사 | A는 B에 있다 | |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비로자나불 | A는 B에 포함된다 | |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김언경 | A는 B와 관련있다 | 860년 |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 A는 B에 기록되었다 |
시각자료
갤러리
- BHST Borimsa Vairocana side.jpg
옆에서 본 모습
- BHST Borimsa Vairocana head.jpg
불두
- BHST Borimsa Vairocana hand.jpg
지권인
- BHST Borimsa Vairocana inscription.jpg
비로자나불좌상 조상기
주석
- ↑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강우방, 곽동석, 민병찬, 『한국 美의 재발견 - 불교 조각 II』, 솔출판사, 2005, 114쪽.
- ↑ 최완수,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4 - 신라 선종과 비로자나불의 출현", 『신동아』 2001년 6월호.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5 - 전남』, 돌베개, 2010. 온라인 참조: "보림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남,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
- 박성연,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연구」,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3.
- 배종민, 「9세기 장흥지역 사찰불사의 성격」, 『지방사와 지방문화』 8(2), 역사문화학회, 2005, 45-75쪽.
- 정현숙, 「신라하대 보림사 금석문의 서체와 그 서풍」, 『목간과 문자』 제15호, 한국목간학회, 2015, 149-173쪽.
- 최완수,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4 - 신라 선종과 비로자나불의 출현", 『신동아』 2001년 6월호.
-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조상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