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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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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5월 19일 (금) 17:2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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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장흥군에 있는 가지산 보림사(寶林寺)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선문구산(禪門九山) 가운데 하나. 가지산선문(迦智山禪門)이라고도 함.


내용

가지산파의 개산조(開山祖) 도의(道義)는 당나라로 건너가서 지장(智藏)의 법을 받고, 821년에 귀국하였다. 신라에 돌아온 그는 당시의 사람들이 선법(禪法)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설악산으로 들어가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하면서 제자를 가르쳐 염거(廉居)에게 법을 전하였다. 염거는 설악산의 억성사(億聖寺)에 오래 머물렀으며, 체징(體澄)에게 법을 전하였다. 체징은 837년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선사들을 만나 보았으나, 도의가 물려준 법밖에 따로 더 구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840년에 귀국하여 보림사를 세우고, 형철(逈徹) 등 800여명의 제자를 배출하여 가지산의 한 선파를 이루었다.


Quote-left.png 처음 도의선사가 서당(西堂: 지장선사(智藏禪師)를 가리킴.)에게서 심인(心印)을 전수받고 후일 우리나라에 돌아와 그 선(禪)의 이치를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만을 숭상하여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宗)에 모이지 아니하고 허탄한 것으로 여겨 높이어 중히 여기지 않았으니, 마치 달마조사가 양 무제를 만났음에도 뜻이 통하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廉居禪師)에게 부촉했다. 이에 염거선사가 설산(雪山: 지금의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체징선사가 가서 그를 섬겼다. 선사가 맑게 일심을 닦고 삼계(三界)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여 목숨을 자기의 목숨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몸을 자기의 몸으로 여기지 않았다. 염거선사가 그 뜻과 기개에 짝할 만한 이가 없고 그 타고난 바탕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 현주(玄珠)를 부촉하고 법인(法印)을 전해 주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06-107쪽.


가지산파의 본사를 보림사로 하였던 것은 중국 남돈선(南頓禪)의 개창조 혜능(慧能)이 조계(曹溪) 보림사에서 크게 선법을 떨쳤는데, 그 전통을 잇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도의는 혜능의 4대 법손이며 혜능의 남돈선을 가장 먼저 신라에 전한 선사로서, 그 정통 선법을 우리나라에서 계승하였다는 뜻으로 보림사라고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종파는 고려말까지 명맥을 유지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도 그 중의 하나이다.[1]


가지산문의 형성과 계승

도의는 784년(선덕왕 5)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馬祖, 道一)의 제자인 서당(西堂, 智藏)의 법을 받아,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하여 진전사(陳田寺)에 머물렀다.

이때에는 교학(敎學)불교가 성하여 세상이 경전의 가르침에 젖어 있었으므로, 무위(無爲)한 선종은 허탄하다고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산림에 은거하고 말았다.

도의는 화엄의 4종법계와 55선지식(善知識)의 행포법문(行布法門) 외에 따로 조사선도(祖師禪道)를 설하였는데, 화엄의 4종법계를 손안에 든 법계라 하고, 55선지식의 행포법을 냇물 중의 포말이라고 하였다. 그는 법을 염거(廉居)에게 전하였다. 염거는 설악산의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법을 체징에게 전하였다.

체징은 837년(희강왕 2) 중국에 들어갔다가 840년(문성왕 2)에 귀국하였다. 처음에 그는 무주의 황학사(黃壑寺)에 머물다가, 859년(헌안왕 3)에 왕의 청으로 보림사(寶林寺)에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김언경 등의 후원을 받으면서 사원세력이 커지고, 가지산사로 사액을 받아 가지산문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으로는 성(性)과 상(相)이 다르지 않음과 마음이 족하면 뜻이 일어남[心足意興] 등이 설해졌다.

그의 제자에 형미(逈微)·영혜 등이 보이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는 형미이다. 형미는 891년에 중국에 들어가 운거(雲居, 道膺)의 법을 받아 905년(효공왕 9)에 귀국하였다. 그는 왕건의 귀의를 받아 같이 왕경으로 왔다가 예에게 피살되었다.

한편, 도의의 법맥을 이어받지는 않았지만, 진공은 설악산 진전사에 들러 도의의 영탑(靈塔)을 배알하고 제자의 예를 갖추었으므로, 가지산문과 연결된다. 그는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침[無師自悟]을 주장하면서 교학불교를 부정하였다.[2]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도의 가지산문 A는 B를 개창하였다
가지산문 장흥 보림사 A는 B를 본산으로 하다
가지산문 선문구산 A는 B에 포함된다
가지산문 염거 A는 B의 법도를 잇다
가지산문 체징 A는 B의 법도를 잇다
가지산문 형미 A는 B의 법도를 잇다
가지산문 일연 A는 B의 법도를 잇다

참고문헌

주석

  1. "가지산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6년 12월 27일 확인.
  2. "선종구산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6년 12월 27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