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대비전유
명성대비전유 | |
한자명칭 | 明聖大妃傳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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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Queen Myeongseong’s letter to Song Siyeol to persuade him to return to government service |
작자 | 명성대비 |
간행시기 | 1680년 |
소장처 | 국립청주박물관 |
유형 | 고문서 |
크기(세로×가로) | 33.0×19.0㎝ |
판본 | 필사본 |
수량 | 1첩 |
표기문자 | 한글 |
정의
1680년(숙종 6) 12월 22일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대비(明聖大妃, 1642~1687)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 출사를 권고하는 전유(傳諭)이다.
내용
1680년(숙종 6) 12월 22일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대비(明聖大妃, 1642~1687)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 출사를 권고하는 전유(傳諭)이다. 1680년 10월 송시열은 서울에 잠시 머물다가 부인의 개장(改葬)과 아들의 병으로 말미암아 다시 서울을 떠났다. 그러나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의 부음을 듣고는 바로 환조(還朝)했고, 그 다음 달에 인경왕후의 지문을 제술하도록 명을 받았다. 12월 지문을 올린 송시열은 다시 서울을 떠났고, 숙종은 승지를 보내 만류하였다. 그래도 송시열이 돌아오지 않자 현종비 명성대비가 돌아오라는 내용의 한글 편지를 직접 써 보냈다. 편지를 받은 송시열은 “이는 옛날 송나라의 선인황후(宣仁皇后)가 사마광(司馬光)을 만류했던 고사(古事)이다.” 하고는 은전에 감격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1]
부연설명
명성대비(1642~1683)는 본관이 청풍이고 성이 김씨이다. 그녀의 나이 9살인 (1651)년에 세자빈으로 간택이 되었다. 당시 세자는 훗날 왕위에 오르는 현종 이었다. 8년후 1659년에 현종 이 보위에 올랐다. 1674년 현종이 승하하고 아들인 숙종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당시 숙종은 나이가 어렸고, 병약했으니 명성대비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남편 현종의 사촌동생이자 현종 12년(1671)에 발생한 조선 대기근 당시, 왕권보다 신권이 강한 조선 왕실을 조롱하는 청 황제 강희제에게서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고 대량의 구휼품을 얻어온 호국의 공이 있는 복선군(福善君)에게 아들의 왕위를 빼앗길까 염려하였다. 당시 복선군에게는 두명의 동생이 있었고, 이 3형제와 현종의 승은궁녀 김상업까지 같이 제거 하려 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홍수의 변 이다. [2]
그러나 조정 관료들은 왕실의 일이니 간여하지 않겠다고 발을 빼려고 할 정도로 의혹스러 하였다. 형식적으로 시작한 수사에서도 복창군과 복평군이 간통을 저지른 증거는 고사하고 이에 대한 근거와 흔적도 찾을 수 없었고, 의금부에서 신문된 복창군, 복평군, 상업, 그리고 명성왕후가 개별적으로 체포하여 대비전에서 고문을 한 귀례마저도 억울하다며 무죄를 호소하였다. 김우명의 고발과 "현종 역시 일찍부터 복창군과 상업의 간통 사실을 알고 내치려고 했으나, 인선왕후가 상업을 신임하여 벌을 주지 못한 것 뿐"이라는 명성왕후의 증언 이외엔 그 어떤 물증도, 증언도, 증인도 찾을 수 없고 당사자들도 강력히 부정하니 수사는 진행될 수 없었다. 평소 모후 명성왕후와 외조부 김우명의 지나친 내정간섭에 시달려왔던 숙종은 부왕이었던 현종이 지극히 아꼈던 복선군 형제에게 굳이 벌을 주고 싶지 않다며 하루만에 무죄판결로 사건을 종결시켰다.그러자 윤휴와 허목은 차자를 올려 왕족을 모함한 청풍부원군 김우명을 무고죄와 반좌율로서 다스릴 것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3]
1675년 3월 13일 오전에 입궐한 윤휴와 허목은 김우명을 반좌율로 처단하라며 3월 14일 새벽까지 대궐앞에서 시위하였고,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이 문제는 본래 현종시대 부터 세도를 부려온 김우명의 행적에 대한 탄핵이 일어났으며, 왕실의 가까운 종친을 모함하여 죽이려고 한 김우명을 무고죄로 처벌하려는 것이다.이 소식을 들은 명성왕후는 숙종의 왕명을 사칭하여 한밤 중에 대신들을 긴급소집, 편전에서 소복차림과 대성통곡으로 이들을 맞이하여 자진을 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리고는 삼복 형제와 상업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김우명을 방면하라는 교지에 서명해 그녀의 앞에서 즉결 시행토록 할 것을 강요했다. 전 국모이자 현왕의 모후인 협박에 대신들은 굴복할 수 밖에 없어 결국 김우명은 방면되었다. 이 사건으로 오랫동안 김우명 및 명성왕후의 강압적인 행동에 폭발한 남인들은 지속적으로 숙종을 압박했다. [4] 이 여파로 명성왕후의 부친인 김명우의 명성은 크게 실추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명성왕후는 이 사건을 계기로 모든 남인필이 박멸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였고, 그녀는 가문에 정치적, 개인적으로 원한을 갖고 있던 서인 산당(山黨: 송시열 일파)을 회유하여 삼복형제와 남인 타도에 나섰다. 이에 이루어낸 것이 경신환국이어지게 된 것이다. [5]
명성대비전유문헌은 바로 경신환국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송시열을 회유하려 한 명성왕후의 글이었던 것이다. 결국 바람대로 송시열은 명성왕후세력에 가담하게 되었다. [6]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명성왕후 | 숙종 | A는 B의 모친이다 | |
명성왕후 | 현종 | A는 B의 부인이다 | |
명성왕후 | 김우명 | A는 B의 딸이다 | |
명성왕후 | 복창군 | A는 B를 유배 보냈다 | 1675 |
명성왕후 | 복선군 | A는 B를 유배 보냈다 | 1675 |
명성왕후 | 복평군 | A는 B를 유배 보냈다 | 1675 |
명성왕후 | 김상업 | A는 B를 유배 보냈다 | 1675 |
남인 | 명성왕후 | A는 B를 비난했다 | |
남인 | 윤후 | A는 B를 포함한다 | |
남인 | 허목 | A는 B를 포함한다 | |
숙종 | 경신환국 | A이 B을 일으켰다 | 1680 |
명성왕후 | 송시열 | A는 B를 포섭했다 | |
송시열 | 남인 | A은 B를 싫어한다 | |
복선군 | 강희제 | A는 B의 질책을 막았다 | |
명성대비전유 | 국립청주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어있다 | |
명성왕후 | 명성대비전유 | A는 B를 저술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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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 | 명성왕후가 명성대비전유을 저술하였다 |
공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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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 | 명성왕후가 PAGENAME을 저술하였다 |
참고문헌
- 논문
- 이재철, 「17세기 朝鮮政治史에서 名分과 利害」, 『퇴계확과 유교문화』, Vol-37, 慶北大學敎 退溪硏究所, 2005, 285~319.
- 장동우, 「《속대전(續大典)》〈예전(禮典)」과 《대전통편(大典通編)》 〈예전(禮典)〉에 반영된 "17세기 전례논쟁[예송(禮訟)]"의 논점에 대한 고찰」, 『한국식학연구』, Vol-9, 한국실학학회, 2005, 155~183.
- 지두환, 「조선후기 예송논쟁(禮訟論爭)의 성격과 의미」, 『東洋學』, Vol-24,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4, 327~335.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158쪽.
- ↑ 명성왕후,
『한글 위키피디아』online , Wikimedia Foundation, Inc. 최종확인: 2017년 04월 30일 - ↑ 홍수의 변,
『한글 위키피디아』online , Wikimedia Foundation, Inc. 최종확인: 2017년 04월 30일 - ↑ 홍수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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