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선암사
순천 선암사 (順天 仙巖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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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순천 선암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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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順天 仙巖寺 |
주소 |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450 등 (죽학리)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507호 |
문화재 지정일 | 2009년 12월 21일 |
관리자 | 순천시 |
교구정보 | 한국불교태고종 |
건립시기 | 875년 |
창건자 | 도선 |
경내문화재 | 순천 선암사 동ㆍ서 삼층석탑, 순천 선암사 승선교, 순천 선암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순천 선암사 북 승탑, 순천 선암사 동 승탑, 순천 선암사 대웅전, 순천 선암사 선각국사 도선 진영, 순천 선암사 서부도암감로왕도, 순천 선암사 33조사도, 순천 선암사 동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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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조계산(曹溪山) 동쪽 기슭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로[1] 한국에서 조계종 다음으로 큰 교세를 가진 태고종의 총본산이다.[2]
내용
역사
선암사 창건과 관련해서는 두가지 설이있다. 첫번째는 542년(진흥왕 3)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처음으로 개창하여 비로암(毘盧庵)이라고 했다는 설이고, 두번째는 875년(헌강왕 1)에 도선(道詵)이 창건하여 선암사라고 하였다는 설이있다.[3][4][5]
선암사는 1092년(선종 9) 의천(義天)에 의해 크게 중창된다.[6][7] 그 뒤 수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1660년(헌종 1) 경준(慶俊), 경잠(慶潛), 문정(文正)이 중건했고 그 뒤에 현변(懸辯)이 많은 건물들을 보수했다.[8] 1698년(숙종 24)에는 호암대사 약휴(若休)에 의해 크게 중건되었는데 당시 선암사는 ‘교학의 연원’이라 할 만큼 교학이 융성하였다. 1759년(영조 35) 봄 또다시 화재를 당해 계특대사가 중창 불사를 하였는데, 화재 발생이 산강수약(山强水弱)한 선암사의 지세 때문이라 하여 화재 예방을 위해 1761년(영조 37)에 산 이름을 청량산(淸凉山)으로, 절 이름을 해천사(海泉寺)로 바꾸었다. 그런데도 1823년(순조 23)에 다시 화재가 일어나자 전령, 눌암, 익종이 지휘하여 대대적으로 중창 불사를 하였으며, 이후 옛모습을 되찾아 산 이름과 절 이름을 조계산과 선암사로 원위치하였다.[9]
1912년에는 사찰령에 의해 31본산 중의 하나가 되어 순천시와 여수시, 여천군의 말사를 통괄했다.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해 이전에 존재하던 65동의 건물이 대부분 불에 탔다.[10][11] 1954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 정화 유시로 불교계는 비구와 대처승 측의 대립이 표면화되었고 선암사는 이러한 정화운동의 여파로 거주승은 한국불교 태고종이, 법적소유는 대한불교 조계종이, 관리는 자치단체인 순천시가 맡아왔었다.[12] 최근에는 법원이 선암사의 소유가 조계종이 아니라 태고종에 있다는 판결을 내려 불교계의 쟁점이 되고 있다.[13]
특징
선암사의 매화梅花
선암사에는 매화·동백·철쭉·산수유·영산홍·수국·물푸레나무 등 많은 꽃나무들이 있어 사시사철 피고진다. 그중에서도 선암사의 매화는 아름답기로 유명하다.[14] 선암사 경내에는 350~650년에 이르는 오래된 매화나무가 50여그루 서식하고 있다. 경내 원통전 각황전 담길을 따라 운수암으로 오르는 길에, 주로 종정원(宗正院) 돌담길에 있는 이들 매화나무를 가리켜 선암사 선암매(仙巖梅)라고 부른다. 선암매는 2007년 11월 26일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되었으며, 꽃이 만개하는 3월 말경이면 이 매화를 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선암사를 찾는다.[15] 선암사 매화의 아름다움은 시인 황동규의 「풍장」에도 등장한다.
선암사 매화 처음 만나 수인사 나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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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황동규,『풍장40』 |
선암사의 차茶
선암사는 차로 유명하다. 선암사 후원에는 천여년의 자생야생차 군락지가 있다. 선암사 야생차의 특징은 구수하고 깊은 맛을 표현하는데, 이는 차나무가 삼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진 음지에서 자라 찻잎이 연하고 운무(雲霧)와 습한 기후가 깊은 맛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선암사에 처음으로 차를 보급한 사람은 도선으로 선암사 일주문 주변에 차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통해 선암사 차가 선과 함께 보급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선암사가 선을 위주로하는 사찰임을 고려해볼 때 도량내에서 참선과 함께 차를 즐겼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선암사의 기록 중 차에 관한 것으로는 상량문 연화질에 다각이라는 소임이 등장하는데 이는 차밭과 차를 관리하는 소임자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일상속에서 차를 즐겨마셨음을 알 수 있다. 해방과 함께 불교분규로 인하여 차밭을 거의 방치하다가 70년대에 스님들의 노력으로 차밭을 손질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16]
선암사와 조정래
작가 조정래는 순천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종현은 16세에 선암사로 출가해 만해 한용운이 이끈 항일 비밀결사체 '만당'의 당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일제의 조선불교 사찰령을 거부한 민족 운동가였으며 선암사에서 결혼한 최초의 승려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불교를 장악함으로써 식민 통치를 쉽게 만들고자 황국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젊은 승려들은 결혼을 통해서 일본 방식의 대처승이 되었다고 한다.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때, 조종현은 주지의 모함으로 경찰서로 잡혀갔다. 군인들의 강압적인 수사와 폭행에 갖은 고난을 겪었고, 당시 그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조정래의 경험들은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쓰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 [17]
옛문헌 속 선암사
도선의 창건기
무외(無畏) 국통이 하산(下山)한 곳인 용암사는 진양(晉陽) 속현(屬縣)의 반성(班城) 동쪽 모퉁이 영봉산(靈鳳山) 속에 있다. 옛날에 개국(開國) 조사(祖師) 도선(道詵)이, 지리산(智異山) 주인 성모천왕(聖母天王)이, “만일 세 개의 암자를 창립하면 삼한(三韓)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전쟁이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 한 비밀스러운 부탁으로 인하여 이에 세 개의 암자를 창건하였으니, 곧 지금의 선암사(仙岩寺)ㆍ운암사(雲岩寺)와 이 절이 그것이다. | ||
출처: 『영봉산용암사중창기』, 동문선 제68권[18] |
김극기의 시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적적한 산 속 절이요, 쓸쓸한 숲 아래의 중일세. 마음속 티끌은 모두 씻어 없앴고, 지혜의 물[智水]은 맑기도 하네. 8천 성인(聖人)에게 예배하고 담담한 사귐은 삼요(三要)의 벗일세. 내 와서 뜨거운 번뇌[熱惱] 식히니, 마치 옥병속 얼음 대한 듯하네.” 하였다. | ||
출처: 『순천도호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0권[19] |
가람배치
가파른 지형
진입공간은 다소 완만한 경사를 이루지만 첫 건물인 강선루(降仙樓)부터는 가파른 지형이 펼쳐진다. 따라서 급한 경사지를 여러 단으로 깎고 그 단부에 축대를 쌓아 점차적으로 오르면서 각각의 단에 평평한 대지를 조성할 수 밖에 없었다. 선암사 건물들이 좌우방향으로는 다소 넓으나 전후 방향으로는 조밀한 것이 그 까닭이다. 이러한 단들은 공간을 오르는 방향으로 분절하여 위계성을 준다. 강선루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길은 여느 사찰에서는 보기 드물게 긴데, 두번을 휘감고 돌아가 가파른 지형을 이룬다.[20]
다양성과 축선
선암사는 사찰의 규모가 크고 불전의 수가 많아 주축 외에도 여러 개의 축을 설정하여 둘 이상의 주불전이나 영역을 통합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주축 상에 위치한 대웅전 영역의 건물군 외에도 원통전 영역, 응진당 영역, 각황전 영역 등 전체를 네 개의 영역으로 건물들이 배치되고 있다. 이러한 소 영역들은 서로 분리되어 어느정도 독립성을 유지하며 축대로 쌓여진 각각의 서로 다른 단위에 펼쳐져 있다.[21]
3無
선암사 가람에는 다른 사찰에는 있는 세가지를 찾아볼 수 없다.
① 사천왕문이 없다. 그 이유는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이라 장군이 지켜주기 때문에 불법의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굳이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② 어간문이 없다. 어간문이란 대웅전의 정중앙에 있는 문으로 다른 사찰에는 정중앙의 문에도 사람이 출입이 가능하지만 선암사에서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자만이 어간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어간문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③ 협시불이 없다.[22]
동영상
- 허범훈, "[다큐멘터리 '남도의 보물 100선' 12회 - 봄이 내린 선암사를 걷다]", YouTube, 게시일: 2015년 4월 3일.
- K-HERITAGE, "절집에 풍기는 고향의 향취, 순천 선암사", YouTube, 게시일: 2014년 8월 25일.
- 여수MBCPrime, "전국시대 선암사의 봄 (순천) 1500년 역사의 고찰 선암사를 찾아서]", YouTube, 게시일: 2016년 4월 6일.
갤러리
VR파노라마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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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5년 | 도선이 선암사를 창건했다 |
1597년 | 정유재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
1660년 | 경준(慶俊), 경잠(慶潛), 문정(文正) 등의 3 대사가 사찰 중수를 시작했다 |
1698년 | 호암대사 약휴(若休)가 중창불사를 완성했다. |
1707년 | 승선교를 조성했다. |
1823~24년 |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건물이 불에 탔고, 이듬해 전령, 눌암, 익종의 3대사가 중창불사를 시작했다. |
1912년 | 일제 총독부의 30본산 제도에 따라 선암사는 호남지역 본사의 하나가 되어 순천시와 여수시, 여천군의 말사를 통괄했다. |
2016년 | 법원이 1심에서 선암사의 소유권은 조계종이 아니라 태고종에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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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 | 순천 선암사 | A는 B에 있다 | |
순천 선암사 승선교 | 순천 선암사 | A는 B에 있다 | |
순천 선암사 원통전 | 순천 선암사 | A는 B에 있다 | |
순천 선암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 순천 선암사 | A는 B에 있다 | |
순천 선암사 북 승탑 | 순천 선암사 | A는 B에 있다 | |
순천 선암사 동 승탑 | 순천 선암사 | A는 B에 있다 | |
순천 선암사 선각국사 도선 진영 | 순천 선암사 | A는 B에 있다 | |
순천 선암사 서부도암감로왕도 | 순천 선암사 | A는 B에 있다 | |
순천 선암사 33조사도 | 순천 선암사 | A는 B에 있다 | |
순천 선암사 동종 | 순천 선암사 | A는 B에 있다 | |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 | 순천 선암사 | A는 B에 있다 | |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 순천 선암사 | A는 B에 있다 | |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 의천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
순천 선암사 대웅전 | 순천 선암사 | A는 B에 있다 | |
도선 | 순천 선암사 | A는 B를 창건하였다 | 875년 |
의천 | 순천 선암사 | A는 B를 중창하였다 | 1092년 |
순천 선암사 | 한국불교태고종 | A는 B에 포함된다 | |
조정래 | 순천 선암사 | A는 B에서 태어났다 | |
조종현 | 순천 선암사 | A는 B에서 출가했다 | |
조종현 | 조정래 | A는 B의 아버지다 |
참고문헌
- 황원갑,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 이계표, 천득염, 최인선, 『선암사』, 대원사, 2014
- 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6』, 1996
주석
- ↑ "순천 선암사", 김상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23일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11 - 한려수도와 제주도』, 돌배게, 2008. 온라인 참조: "선암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 ↑ "순천 선암사", 김상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23일 - ↑ 통일신라 말에 도선이 창건했다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신라 법흥왕대는 불법이 신라에 전래되어 공인된 시기이므로 불교 홍포(弘布)로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있는데 아도화상이 신라의 적대국이 백제 지역까지 와서 사찰을 중건하였다는 것은 그대로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 하대에 대웅전 앞 마당에 조성된 삼층석탑 등의 유물로 볼 때도 신라 말 도선 창건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이계표, 천득염, 최인선, 『선암사』, 대원사, 2014, 13쪽. 온라인참조:"선암사",
『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 절 이름을 '선암'이라고 한 이유는 절 서쪽에 선인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하는 10여장(丈) 높이의 평평하고 큰 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도선의 창건 배경과 관련되는 내용이다."선암사",한국의 풍수지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23일. 황원갑,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63쪽 - ↑ 최선호, 『한국의 미 산책』, 해냄, 2007. 온라인 참조: "선암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 ↑ 의천은 지리산 화엄사와 무등산 규봉암 등 전남지방을 돌아보는 도중에 조계산의 빼어난 경치게 감탄하여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했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쓰여진 대각암 관련 기록에서 의천이 주석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계표, 천득염, 최인선, 『선암사』, 대원사, 2014, 15쪽. 온라인참조:"선암사",
『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 "선암사",한국의 풍수지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23일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11 - 한려수도와 제주도』, 돌배게, 2008. 온라인 참조: "선암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 ↑ "선암사",한국의 풍수지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23일 - ↑ 지금도 선암사에는 전각 곳곳에 물 수(水) 자와 바다 해(海) 자를 각(刻)해 놓아 화재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선암사 일주문을 나가면서 바라보면 ‘청량산 해천사’라고 전각한 현판이 걸려 있어 그 당시의 절박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최선호, 『한국의 미 산책』, 해냄, 2007. 온라인 참조: "선암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 ↑ 이계표, 천득염, 최인선, 『선암사』, 대원사, 2014, 21쪽.
온라인참조:"선암사",
『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 노덕현, "법원, 선암사 소유 ‘태고종’ 손 들어줘", 현대불교, 2016년 7월 19일
- ↑ 최선호, 『한국의 미 산책』, 해냄, 2007. 온라인 참조: "선암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 ↑ 김현우, 『매화나무』, 한국학술정보(주), 2010. 온라인 참조: "선암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최종확인: 2017년 04월 24일. - ↑ "차의 역사", 조계산 선암사 홈페이지
- ↑ 정보훈, "순천 사람 조정래, 그와 함께 둘러보는 고향 풍경", 오마이뉴스, 2016년 6월 17일
- ↑ 이식(역), 1968, 온라인참조: "영봉산용암사중창기"
『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 이민수(역), 1970, 온라인참조: "순천도호부"
『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 "가람안내", 조계산 선암사 홈페이지
- ↑ "가람안내", 조계산 선암사 홈페이지
- ↑ "가람안내", 조계산 선암사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