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인문학 - 아카이브와 인문학 연구의 통섭
목차
디지털 인문학 - 아카이브와 인문학 연구의 통섭[1]
김 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정보학 교수
1. 나의 아카이브, 나의 인문학
“당신이 의식하고 있든 아니든, 당신의 집에는 당신의 아카이브가 있습니다.
서재의 캐비넷 속 파일, 지하실에 내려 놓은 상자, 다락에 올려 둔 궤짝 …….
가족의 생활사에 관한 의미 있는 기록물을 담아놓은 이것들은 바로 당신 개인의 아카이브입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홈페이지에 게시된 이 글을 디지털 인문학 수업 시간에 자주 인용하곤 한다. ‘디지털’이나 ‘인문학’이란 단어가 들어 있지 않은 이 말을 ‘디지털 인문학’의 화두로 삼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집’이 곧 ‘나의 아카이브’일 수 있다는 이 생각을 좀 더 발전시켜 보기로 하자. 부모님이 남기신 빛바랜 사진첩, 나의 초등학교 졸업장, 가족과 함께 갔던 여행지의 관광안내지도와 기념품……. 남의 눈에는 하찮게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의미 있는 가족사의 기록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상자에 넣어 보관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나의 아카이브’의 콘텐트를 선별하여 수집하고 보존하는 아키비스트(archivist)이다.
때로는 어릴 적 기억을 상기시키는 사진이나 물건을 상자 속에서 꺼내 거실 벽에 걸어두거나 창틀 위에 올려놓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우리 집의 이곳저곳은 내 가족사의 이런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이 점에서 보면 나는 이 작은 갤러리, 또는 뮤지엄의 전시 기획을 담당하는 큐레이터(curator)이기도 하다.
상자 속의 물건을 꺼내어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이려 할 때마다 내가 하는 일은 먼지를 털고 찢어진 곳을 손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60년 전, 어머니의 소녀 시절 사진 속의 목조 건물이 어느 곳인지, 30년 전, 갓난아이였던 아들을 안고 찾았던 강릉의 고가가 어떤 역사를 안고 있었던 곳인지 알아보려는 욕구가 일어나고,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실마리를 인터넷에서 찾기 시작한다. 이 순간에는 나도 학구적 관심사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인문학 연구자(researcher)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소장품의 다양함이나 그것에 관한 지식의 깊이는 논외로 하자. ‘나의 집’이 곧 ‘나의 아카이브’일 수 있다면, 그 영역의 주인인 우리 개개인은 모두 기록관리자이자 전시기획자이며, 인문학연구자일 수 있다. 그 세 가지 역할을 따로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하는 것이다. 삶의 흔적을 소중히 간직하고, 그것에 대해 더 많이 더 바르게 알려고 하고,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들을 가족이나 이웃과 공유하면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사실상 기능적으로 분리할 필요가 없는 한 가지 일이다.
‘나의 아카이브’라는 한정된 영역에서는 아카이빙과 큐레이션, 그리고 인문학 탐구가 하나로 연결되는 이러한 경지가 낯선 모습이 아니다. 미래의 인문학은 이와 유사한 통섭이 한 개인이나 집안의 범위를 넘어서서 지역사회나 국가와 같이 보다 넓은 영역에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한다. 전문성의 추구라는 이유로 분과 학문 사이의 벽을 높여 온 아날로그적 세계에서는 이러한 소통이 용이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의 클릭으로 기관, 지역, 전공의 경계를 넘을 수 있는 디지털 세계에서는, 그것이 어디에 있든 문맥이 통하는 모든 것의 합종·연횡이 가능하리라는 이상이 우리로 하여금 미래의 다학문적 통섭을 꿈꾸게 한다. 그러한 이유에서, 디지털 환경에서 소통하고 통섭하는 미래의 인문학을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한다.
2. 디지털 인문학의 함의
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은 디지털 환경(digital environment)에서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그 연구와 교육의 성과를 우리 사회에 확산시키는 활용 노력 등을 포함하는 말이다. 2008년 미국의 인문학재단(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 NEH)이 디지털 인문학 지원단(Office of Digital Humanities)을 설치하고 각 대학의 디지털 인문학 연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면서, 디지털 인문학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대학의 새로운 관심사로 부상하였다. 한국의 인문학자들 사이에서도 최근 수년 사이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디지털 인문학은 단순히 인문학 자료를 디지털화 하거나, 연구 결과물을 디지털 형태로 간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보 기술의 환경에서 보다 창조적인 인문학 활동을 전개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디지털 매체를 통해 소통시킴으로써 보다 혁신적으로 인문 지식의 재생산을 촉진하는 노력이 디지털 인문학이다.
디지털 인문학이라는 말이 학계와 교육계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기 전에도 인문 분야의 연구 자료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여 학자들의 연구의 편의를 돕는다든지, 전자책을 만들어서 교육 교재로 활용하는 일이 적지 않게 이루어져 왔다. ‘인문학 자료 전산화’라고 했던 이러한 유의 일들과 오늘날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하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그 두 가지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누가 하느냐’이다.
‘인문학 자료 전산화’는 정보처리 기술을 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인문학 연구자와 교육자, 피교육자들을 위해 인문학 자료를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료 이용의 편의성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에 반해, ‘디지털 인문학’은 인문학 연구자와 교사, 학생들이 디지털 환경에서 자기주도적으로 연구와 교육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의 활용을 통해 예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새로운 연구·교육 성과를 도출하고 이로써 인문학의 사회적 기여를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3. 디지털 아카이브, 디지털 큐레이션
‘디지털 아카이브’는 디지털 기술을 도구로 삼아 전통적인 아카이브 기능을 효율화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분과학문의 벽을 넘어서서 폭넓은 지식의 문맥을 이루어내는 것이 디지털 인문학의 관심사이듯이, 디지털 아카이브의 새로운 과제는 아카이브의 실물 자료 하나 하나가 인류, 국가, 지역, 조직의 문화에 관한 지식의 문맥(context) 속에서 하나의 노드(node)로 기능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디지털 인문학의 세계에서는 인문학 연구실과 아카이브가 별개의 분리된 영역일 수 없다. 인문학 연구실의 연구자가 인문 지식을 탐구할 때, 그 지식의 근거가 되는 원천 자료를 아카이브에서 바로 참조할 수 있고, 아카이브의 큐레이터는 실물 자료 하나 하나에 대해 그것이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어떠한 문맥 속에서 의미를 갖는 것인지, 인문학 지식과의 연계를 통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실현하는 융합연구가 ‘디지털 큐레이션’이고, 그러한 융합연구의 현장이자 그 성과를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체계의 중심이 ‘디지털 아카이브’이다.
2009년 미국에서 디지털 인문학의 필요성을 인식한 일군의 인문학자들이 디지털 인문학 선언(The Digital Humanities Manifesto)을 발표했다. 그 선언문 속에는 연구실과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던 인문학 연구와 교육이 박물관, 아카이브를 무대로 하는 큐레이션과 하나로 융합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대학의 인문학 연구가 이론 탐구를 위주로 하고, 그 이론의 증거가 되는 실물 자료를 수집, 보존, 정리, 전시하는 아카이브와 박물관의 기능을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해 온 것을 비판하고, 미래의 인문학은 실물 자료가 있는 현장이 곧 인문학의 연구 무대가 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아카이빙이나 큐레이션, 그리고 인문학 제분과의 학술 연구가 각기 다른 전문성을 요구하는 분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러한 주장이 낯설고 무리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디지털 인문학 선언의 취지는 그 특화된 전문성을 외면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 영역 사이의 연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대학과 아카이브, 박물관이 각기 다른 물리적 공간에 독립적인 기관으로 존재하는 아날로그 세계에서는 각각의 기관에 종사하는 교수, 연구원, 기록관리사, 학예연구사들이 각기 다른 부류의 전문가들이었고, 자료의 열람이나 연구 참여도 각각의 기관이 정한 규정을 따라야 하는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대학의 연구실도, 아카이브의 수장고도, 박물관의 전시실도 디지털 공간으로 옮겨간 상황에서는 새로운 협업의 패러다임이 요청되지 않을 수 없다.
아날로그 세계에서는 대학의 강의실에서 고조선 시대에 대한 강의를 듣는 것과 박물관의 청동기/고조선실을 관람하는 것이 다른 일이었다. 디지털 세계의 가상공간에서는 그것이 별 개의 두 가지 일일 필요가 없다.
이론과 증거 자료를 하나의 디지털 공간에서 실시간으로 상호참조하는 디지털 강의실(=디지털 연구실=디지털 전시실=디지털 아카이브)은 디지털 인문학 교육의 청사진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것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만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날로그 세계에서 다른 공간, 다른 전문 분야에 속했기 때문에 고립되고 소통하지 못했던 지식과 자료들을 디지털 세계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형태로 재구성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인문지식의 디지털 큐레이션(Digital Curation of Humanities Knowledge)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과제는 디지털 기술 전문가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지식과 자료에 대한 식견이 있고, 그것을 탐구할 학술적 동기가 있는 인문학 연구자들이 주체가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점에서 현재의 디지털 인문학 교육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미래의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디지털 시대의 통섭적 패러다임에 대한 안목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기술적 능력을 갖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의 인문학자는 인문학 연구자(researchers of humanities disciplines)이면서, 아키비스트(archivists)이자 큐레이터(curators)가 될 것이다. 미래 인문학을 준비하는 현재의 디지털 인문학은 역사, 문학, 철학 등 인문학 제분야의 지식이 보다 용이하게 아카이브의 실물(archival objects)에 다가갈 수 있게 하는 디지털 큐레이션 연구와 인문지식 큐레이터의 육성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림 1} 디지털 큐레이션 연구 사례: 그래프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한 고문서 내용 분석 및 시각화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 디지털 아카이브
{그림 2} 디지털 큐레이션 교육 사례: 민족기록화 가상 미술관 - 한국문화/예술 자료와 한국학 지식이 만나는 디지털 전시 공간의 구현
- ↑ 기록인(IN) 36호 (국가기록원, 2016.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