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운-진주성싸움
진주성싸움 | |
작가 | 강대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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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연도 | 1975년 |
규격 | 300호(197x290.9cm) |
유형 | 전쟁 |
분류 | 유화 |
소장처 | 미상 |
목차
설명
임진왜란중인 1592년 10월 1차 진주성싸움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장군이 3,800명의 관군과 2만여명의 백성들을 지휘하여 진주성을 공격하던 왜군을 격파하여 곡창지대인 호남 진출을 막아낸 장면을 담았다.
설명
작품 소재
김시민 장군,
왜군하단의 중앙에는 일본의 전통 투구인 가부토를 쓴 귀신 모양을 한 왜장이 한손에 흰 빛의 일본도를 치켜 들고 있다.
작품 배경
작품 상단 왼쪽 끝에는 푸른 색으로 칠해진 남강이 보이고, 왜군의 주요 공격 지점이었던 동문과 북문을 두축으로 성을 공격하는 적군에 대항하여 각종 무기로 반격하는 조선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차 진주성싸움에서 왜군은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와 나무 방패를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였는데, 이 작품의 여러 곳에서 대나무 엮은 것을 방패로 삼아 성을 향해 조총을 발사하는 왜군과 사다리를 타고 성안으로 진입하려는 적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김시민 장군은 백성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군기(軍旗)를 여럿 세워 병력을 많아 보이게 하는 심리전을 걸었는데, 그림에서도 성안에 노랑,파랑,적색의 수 많은 용대기들이 나부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작품 구도
다른 작품들과 달리 전경과 중경을 격퇴당하는 적군의 모습으로 가득 채우고 이를 검은 색의 거친 윤곽선과 전체적인 붉은 톤으로 묘사함으로써 보는 이의 긴장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널려있는 적군의 시체, 총포의 폭음과 인마(人馬)의 절규로 가득한 아비규환의 상황은 잔혹한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반감(反感)이나 비애가 아닌 적의 파멸을 통한 아군의 승리를 역으로 강하게 전달한다.[1] 일반적인 민족기록화는 주요 장수나 아군을 중앙에 배치하여 중심으로 삼고 아군의 시점에서 적군의 공격을 막아내거나 추격하는 구도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 원근감을 이용하여 화폭을 상하로 이등분하여 작품 하단에 적군을 배치하였다.
시각적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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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민족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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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7월 8일 김형구-한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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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8월 28일-8월 31일 박항섭-연안성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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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노드 | 관계 | 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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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운-진주성싸움 | ~에 의해 그려지다 | 강대운 |
강대운-진주성싸움 | ~을 소재로 삼다 | 진주성싸움 |
강대운-진주성싸움 | ~을 소재로 삼다 | 김시민 |
강대운-진주성싸움 | ~을 배경으로 한다 | 진주성 |
시간정보
중심 | 시간정보명 | 시간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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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운-진주성싸움 | 제작연도 | 1975년 |
강대운-진주성싸움 | 1군사령부 대여기간 | 1991.11.30 ~ 1992.11.29 |
공간정보
중심 | 연결정보 | 공간정보이름 | 경도 | 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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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운-진주성싸움 | 소장처 | 육군 제1군 사령부 | 37.3876635 | 127.9310766 |
그래프
참고문헌
- 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03년, 92-93쪽.
- 대한민국국회의원동우회, 『민족기록화 전승편』,1981년, 104-108쪽.
주석
- ↑ 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년, 92-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