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고달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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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고달사지 (驪州 高達寺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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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여주 고달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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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驪州 高達寺址 |
주소 |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1-1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382호 |
문화재 지정일 | 1993년 07월 23일 |
건립시기 | 764년 |
경내문화재 | 여주 고달사지 승탑,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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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절터.[1]
내용
역사
고달사는 764년(경덕왕 23)에 창건되었던 사찰로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2] 신라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를 열었던 현욱(玄昱)이 절을 중건하였고, 862년(경문왕 2) 훗날 진경대사(眞鏡大師)로 불리운 신라말의 고승 심희(審希)가 이곳에서 현욱의 제자가 되었다. 고려 광종 이후 역대왕의 비호를 받아 대찰(大刹)의 면모를 유지하였는데,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는 심희에게 법을 이어 받은 후 고달사에서 28년간 주석하며 중창하여 고려 초 3대 사찰 가운데 하나가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대략 17세기 후반 무렵에 폐사된 듯하다.[3] 오늘날의 고달사터 대부분은 논과 밭, 농가의 터전으로 변해 있다. 절터의 석물들 또한 논밭과 마을집의 석축으로 쓰여진 듯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4]
사찰 명칭의 유래
고달사에는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한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데 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 스님이 되니 이 절을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동영상
- TAEMIX STUDIO, "사라진 절터의 비밀, 고달사지 -태믹스의 역사지식문화 콘텐츠", YouTube, 게시일: 2015년 6월 4일
갤러리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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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4년 | 고달사가 창건되었다 |
신라시대 | 현욱이 고달사를 중건하였다 |
862년 | 심희가 고달사에서 현욱의 제자가 되었다 |
고려시대 | 찬유가 심희에게 법을 이어받아 고달사에 28년간 주석하면서 사세를 키웠다. |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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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고달사지 승탑 | 여주 고달사지 | A는 B에 있다 |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 여주 고달사지 | A는 B에 있다 | |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 | 여주 고달사지 | A는 B에 있다 |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 찬유 | A는 B를 위한 탑이다 |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 찬유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심희 | 찬유 | A는 B의 스승이다 | |
현욱 | 심희 | A는 B의 스승이다 |
참고문헌
- 김용선, 『玄昱ㆍ審希ㆍ璨幽와 여주 고달사』, 한국중세사연구 제 21호, 2006, 111~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