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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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장동룡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6년 12월 25일 (일) 22:1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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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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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김성일
성격 문신
유형 학자



개요

조선 중기 문신이며 학자.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본관은 의성, 안동 출신이다.

1556년(명종 11) 도산(陶山)의 이황을 찾아가 수학했으며, 68년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에 나아갔다. 09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 1592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나 유성룡의 변호로 다시 경상우도 초유사가 되었다. 그는 관군과 의병을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했다. 당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돕는 한편,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들과 협력하여 진주성을 보전하게 했다. [1]

1593년(선조 26) 계속된 병란으로 기근이 계속되고 전염병까지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 와중에서 김성일은 밤낮으로 수고하다가 자신도 병에 전염되어 사망하고 만다. 임종 당시 아들 김혁(金㴒)도 함께 병에 걸려 옆방에 있었으나 한 번도 그에 대해 묻지 않고 오직 군정에 대해서만 말하였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이후 경상우도 지역의 군대 통솔에 동요가 생기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정치적으로 동인에 가담했고,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는 유성룡·김우옹 등과 남인을 이루었다.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적 구실을 했다. [2]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 후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1592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서울로 소환되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었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였고, 함양·산음(山陰)·단성·삼가(三嘉)·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였으며,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 조선시대에 의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임시로 파견하던 벼슬)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1592년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과 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하여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해 도내 각 고을에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죽었다. [3]


노드 및 관계 테이블

노드 관계 노드
김성일 ~에 참전하였다 진주성싸움


참고

  1. 네이버지식백과(한국고중세사사전), '김성일'
  2. 한국사콘텐츠, '김성일'
  3.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