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실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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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실상사 (南原 實相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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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남원 실상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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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原 實相寺 |
주소 |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33-3 외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309호 |
문화재 지정일 | 1984년 10월 19일 |
관리자 | 남원시 |
교구정보 | 대한불교조계종 |
창건자 | 홍척 |
경내문화재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남원 실상사 석등, 남원 실상사 동서삼층석탑,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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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1]
개요
역사
828년(신라 흥덕왕 3)에 홍척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산문을 처음 세우면서 창건하였다. 그 뒤 2대조 수철을 거쳐 3대조 편운에 이르러서 절을 크게 중창하고 선풍을 더욱 떨치게 되었다.[2]
이후 고려시대 때, 조계종 실상산파로 종명을 개칭하였는데 이 때가 실상사의 최대 융성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127년~1130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 실시한 발굴 조사에서도 창건 이후 약 300년이 지나 대대적으로 중창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3]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는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실상사도 불타버린 뒤 폐사되다시피하여 약 200년 동안 승려들은 부속암자인 백장암에 기거해야했다. 숙종 대에 이르러 수도승 300여명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36동의 건물을 다시 세웠다. 이후 순조 21년(1821)에도 중건되었으나 고종 20년(1883) 함양 출신 양재묵, 민동혁 등이 불을 질러 아까운 사찰 건물들이 불타버리는 수난을 겪은 뒤 이듬해에 여러 승려들의 힘으로 10여 채의 건물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4] [5]
지리
갤러리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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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년 | 지종이 원주 거돈사에서 열반을 맞이했다. |
1025년 |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가 건립되어 최충이 비문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
1948년 | 일본인 집에 있던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
1968년 | 원주 거돈사지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
1984년 | 원주 거돈사지에 대한 정비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
1989~1992년 | 한림대학교박물관을 중심으로 4차례에 걸쳐 원주 거돈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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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 원주 거돈사지 | A는 B에 있다 | |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 | 원주 거돈사지 | A는 B에 있다 | |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 | 국립중앙박물관 | A는 B에 있다 | |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 지종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지종 | 원주 거돈사지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지겸 | 원주 거돈사지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 최충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1025년 |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 김거웅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참고문헌
주석
- ↑ "실상사", 김현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2년 7월 10일 - ↑ "실상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0일 - ↑ "실상사", 김현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2년 7월 10일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 참조: "실상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최종확인: 2017년 04월 10일. - ↑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62050 실상사]",
『두산백과』online , 최종확인: 2017년 4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