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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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3월 31일 (금) 16:19 판 (부연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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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문지
한자명칭 諺文志
영문명칭 A study book about Hunminjeongeum
작자 유희 찬
간행시기 1824년(순조24)
기탁처 진주유씨 서파후손가
소장처 장서각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33.4×21.8㎝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표기문자 한자, 한글



정의

유희(柳僖, 1773~1837)가 지은 훈민정음에 관한 연구서이다.

내용

유희(柳僖, 1773~1837)가 지은 훈민정음에 관한 연구서이다. 유희는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 표기하고, 훈민정음이 원나라 파스파(Phags-pa, 八思巴)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하였다. 이 책은 서(序), 초성례(初聲例), 중성례(中聲例), 종성례(終聲例), 전자례(全字例)로 구성되어있다. 초성례에서는 초성으로 쓰이는 25자모를 제시하고 도표로 작성하였다. 중성례에서는 중성(모음)의 15가지 형태를 설정하며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종성례에서는 7개의 종성을 설정하였다. 전자례에서는 초성 25자, 중성 15자, 종성 7자를 설정한 근거와 학설을 요약·집성하였다. 이 책은 종래 한자음 위주의 연구 방법을 지양하고, 우리말 위주로 문제에 접근한 첫 연구서이다. 조선 후기 훈민정음 연구서 중 뛰어난 저작으로 평가받아 현재까지 학자들의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1]


부연설명

유희의 스승인 정동유(鄭東愈)는 조선 양명학 학자 정제두(鄭齊斗)의 제자 이광려(李匡呂)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들은 강화학파(江華學派)라 불리며 조선 후기의 운학 연구를 주도하였다. 강화학파는 양명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학문 자체에 경주하기 보다는 시문이나 사학, 국어사 등 인문과학적 연구에 집중하였다. 양명학은 당대 민족과 민족이 처한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었으며 역사, 국토, 언어 등의 연구를 민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고 이러한 흐름을 따라 조선 후기 국학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었다. 당시 성리학자들에 의해 양명학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취급되었으므로 사상적 연구보다는 국어학 연구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배경 또한 고려해봐야 할 사항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유희가 언문을 연구하는 서적을 저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게다가 난립한 언문의 표기를 바로잡는것은 양명학의 격물(格物 :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의 이치와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유희는 『언문지』의 서문에서

이에 나는 정동유 선생과 더불어 검토하고 연구하였다 이미 수개월이 되었으니 돌아와 책 한 권을 짓고 《『언문지』諺文志)》라 이름하였다.(乃不佞與講辨 旣數月 歸著一書 名諺文志)

라고 했는데 유희의 학문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 정동유는 훈민정음을 높이 평가하였고 언문 체계를 정비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유희는 정동유와 함께 몇 개월의 연구를 진행한 결과물로서 『언문지』의 초본을 작성하였다. 그 후 최세진의 『사성통해』를 읽고 『언문지』를 완성하였는데 『사성통해』는 한자의 중국 음을 표시하고 있는 운서로 간행 시기와 유희가 살고 있던 시기의 한자음 그리고 최세진이 역관으로 중국에 가서 경험한 한자음이 서로 다른 세 가지 음운체계가 반영되고 있었다. 즉 유희가 『언문지』를 저술한 가장 주요한 의도는 복합적인 한자음을 바로잡고 한자를 바르게 표기하기 위해 한글의 음운체계부터 정리하려는 것이었다. <fef>신수영,『《언문지(諺文志)》의 체제와 유희(柳僖)의 언어관 연구』, 이화대학교, 2001</ref>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유희 언문지} A는 B를 저술하였다 1824년
훈민정음 언문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중심 시간 내용
1824년(순조24) 언문지 간행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127.054364 37.392258 장서각에 소장되어있다


참고문헌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42쪽. 해설문 속의 각종 링크 정보는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에서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