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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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사건정보 김지선

개요

임진왜란 중이던 1592년 6월(선조 25, 음력. 이하 모두 음력) 평양성이 함락된 때부터 명군과의 협공으로 평양성을 탈환한 때까지 평양에서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에 벌어졌던 네 차례의 전투를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1593년(선조 26) 1월의 전투만을 뜻하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평양성 전투(平壤戰鬪)는 1592년~1593년에 걸쳐 평양을 둘러싸고 조선과 일본이 총 4번의 전투를 벌였으며, 3차례 전투에서 조선군이 모두 패했으나 4차 전투에서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평양성을 탈환했다.

배경

경과

제1차 평양성 전투

틀:전쟁정보 김지선 한양을 함락시키고 맹렬한 속도로 진격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7월 9일(음력 6월 1일) 개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으로 출발했다.
이에 7월 19일(음력 6월 11일) 조선선조는 다시 평양에서 의주로 피란하고 평양은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이조판서 이원익 등이 지키게 되었다. 성 안에서는 군민 3000~4000명이 을밀대 부근 숲에 옷을 걸치게 하여 군사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7월 21일(음력 6월 13일) 대동강에 도달한 고니시의 부대는 진을치고 양각도를 건너 대동관을 조총으로 사격했다. 이에 윤두수이원익, 김침 등이 동대원의 일본군 진영을 기습 공격해 수백 명을 죽이고 말 수십 필을 빼앗았다.
그러나 다른 일본군들이 석회탄에 진을 쳐 여기를 지키던 조선군이 크게 패해 도망쳤다. 보고를 들은 윤두수허숙김억추를 시켜 대동강을 지키게 하고 7월 22일(음력 6월 14일) 새벽에 고언백을 시켜 400명의 병정을 주어 부벽루능라도로 강을 건너 기습 공격을 하게 했으나 군령을 지키지 못해 오히려 패배해 왕성탄으로 건너왔다.
이것이 치명적인 패배의 원인이 되어 대동강의 수심이 얕은 것을 본 일본군이 강을 건너 평양성을 공격해 왔고 결국 윤두수김명원은 군사들을 내보낸 뒤 무기를 모두 풍월루의 연못에 버리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평양성은 전쟁 개전 60일 만에 일본군에게 함락당했다.







제2차 평양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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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이 함락된 후 의주에 피란하던 선조는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원군을 요청하였고 명 황제 만력제요동 부총병이자 당시 중국에서 이름난 장수였던 조승훈을 우군 부총병으로 임명하고 3000명의 군사를 주어 조선명나라 1차 원군으로 파견되게 한다.
조승훈의 3000명 명군은 1592년 7월 초순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3000명 군사와 합류해 평양 북방 순안군에 집결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명군을 지원하였고 조승훈평양에 도착하였다.
당시 평양성에는 1만 8700명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1만 1000명의 구로다 나가마사가 있었는데 구로다 나가마사의 병력은 황해도로 옮겨갔는데 이를 본 척후장 순안 군수 황원이 적의 주력 부대가 빠져 나가는 것으로 잘못 보고하여 8월 23일(음력 7월 17일) 아침 조명 연합군평양성으로 진격했다.
평양성의 문이 열려 있고 적들이 보이지 않자 명군의 선봉장 사유는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병력을 모두 평양성 안으로 진격시켰고 이것이 치명적인 패배의 원인이 되어 길 양편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조총 사격으로 크게 패해 사유가 일본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전사하고 부장 천총장국충 등도 전사하였다.
결국 부상까지 입은 조승훈은 수십 기의 남은 병력만 이끌고 8월 24일(음력 7월 18일) 요동으로 돌아가고 말았고 조명 연합군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패배로 끝났다.






제3차 평양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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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평양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의 첫 패전 이후 일본군들을 견제하기 위해 의병들이 나서 중화군임중량윤봉, 차은진차은로 형제 등이 의병을 이끌고 진지를 세우고 일본군들과 싸웠으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중화군을 대공격하여 의병이 대부분 전멸하고 윤봉이 전사하였다.
한편 평양성의 일본군 병력이 약화되었다고 생각한 조선 조정에서는 총 2만 명의 일본군보다 더 많은 병력을 모아 단독으로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결정했다.
순변사 이일이 동쪽에서, 조방장 김응서가 서쪽에서, 순찰사 이원익이 북쪽에서 공격하기로 했으며, 9월 6일(음력 8월 1일) 평양성 보통문 밖에 조선군이 이르자 일본군 50명이 공격을 해왔다. 이에 조선군도 활을 쏘아 20명을 사살했다. 조선군은 사기가 올라 성문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으나 이때 성안에서 일본군 수천 명이 나와 공격하면서 결국 조선군은 둘로 갈라져 지휘가 마비되고 훈련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군사들을 흩여져 버리고 조선군은 왜군의 맹공격에 밀렸다. 남은 병력은 간신히 부산원 서쪽으로 후퇴했고 재빨리 후퇴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사상자를 줄였으나 임진왜란 전투 중 최초로 같은 장소에서 3번째로 전투에서 패한 기록을 남겼다.
이 중 김응서만이 적진에 돌격하여 7000명이 전사하고 일본군에게 대패하였다.

3차 평양성 전투의 의미

명나라의 원군 이후 최초의 조선군 독자적인 작전이었다.
비록 대실패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조선군도 2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사용이 가능했다는 의미가 있다.




제4차 평양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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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전투가 1592년 12월에 있었다. 명나라는 이여송(李如松)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온 명군은 다음 해 1월 6일 이른 아침 조선 관군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하고 칠성문(七星門)·보통문·함구문(含毬門) 등 세 성문 밖에 진을 쳤다.
이에 조선의 이일(李鎰)·김응서의 군대와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의 승군도 합세하였다. 전군에 명을 내려 평양성의 서북면을 포위하게 하였다. 이어서 오유충(吳唯忠)·사대수(査大受)와 승군은 모란봉(牡丹峰), 양원(楊元)·장세작(張世爵)은 칠성문, 이여백(李如柏)·이방춘(李芳春)은 보통문, 조승훈·낙상지(駱尙志)는 이일·김응서와 함께 함구문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제독 이여송은 기병 100여명을 거느리고 모든 장수를 지휘하며 후퇴하는 자는 목을 베고 먼저 성에 오르는 자에게는 은(銀) 50냥을 준다며 사기를 북돋웠다. 이에 일본 장수 고니시는 연광정(練光亭)의 토굴로 도망가고 칠성문·보통문·모란봉 등지의 제장들도 여기에 모여서 응전하였다.
이여송은 이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으나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막다른 지경에 빠진 왜적들이 죽을힘을 다할 것을 염려, 성밖으로 군사를 거두고 고니시에게 성을 열어줄 테니 퇴각하라고 하였다. 고니시는 군량과 무기가 바닥나고 원군도 오지 않자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여송이 이 사실을 조선 진영에 통보하자 조선측은 복병을 철수하고 길을 열어주었다.
이에 고니시는 남은 군사를 거두어 중화·황주(黃州)를 거쳐 다음 날 봉산(鳳山)에 이르렀는데, 이 곳에 둔진했던 일본군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서울로 후퇴하고 조선은 비로소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이 평양성 탈환은 이제까지 후퇴만 계속하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주요 계기가 된 전투였다.






결과

평가 및 의의

관련 기록

  •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11일 병인 13번째기사: 전투 이후 명군이 1만명에 가까운 평양 백성들을 학살해 수급을 베고 남은 시신은 대동강에 버려졌음을 알 수 있다.
是戰也, 南兵輕勇敢戰, 故得捷賴此輩, 而天兵死傷者亦多, 呼飢流血, 相繼於道。 後山東都御史周維韓, 吏科給事中楊廷蘭等, 上本以爲: "李如松 平壤之役, 所斬首級, 半皆朝鮮之民, 焚溺萬餘, 盡皆朝鮮之民。" 中朝, 因此令布政韓就善, 巡按周維翰等, 親至平壤, 杳覈眞僞, 且令本國, 據實以聞。 本國亦爲辨明。
이 전투에서 남쪽의 군사들이 날래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에 이들을 힘입어 승리할 수 있었으나, 명나라 군사의 사상자도 많았으며 굶주려 부르짖으며 피를 흘리는 자가 길에 잇따랐다. 뒤에 산동 도어사(山東都御史) 주유한(周維韓)과 이과 급사중(吏科給事中) 양정란(楊廷蘭) 등이 올린 주본(奏本)에 이여송이 평양의 전투에서 벤 수급 중 절반이 조선 백성이며,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1만여 명도 모두 조선 백성이라고 하였다. 중국 조정에서는 이를 인하여 포정(布政) 한취선(韓就善)과 순안(巡按) 주유한 (周雀翰) 등으로 하여금 직접 평양에 가서 진위를 조사하게 하고, 또 본국도 사실에 의거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본국에서도 변명을 하였다.
  • 『징비록』 권 3, 12월에 명이 대군을 보내다[1]: 『징비록』은 임진왜란때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전쟁을 지휘하였던 유성룡이 남긴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으로, 4차 평양성 전투 당일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翌日朝 進圍平壤 攻普通門七星門 賊登城上 列竪白紅旗拒戰 天兵以大砲火箭攻之 砲聲震地 數十里 山岳皆動···駱尙志 吳惟忠等 率親兵 蟻附而登 前者墮 後者升 莫有退者 賊刀槊下 垂城堞如蝟毛 天兵戰益力 賊不能支 退入內城 斬戮焚燒 死者甚衆
다음 날 아침 명나라 군대는 진격하여 평양을 포위하고 보통문, 칠성문을 공격하였다. 적은 성 위에 올라 붉고 흰 깃발을 줄지어 세우고 항전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대포와 불화살로 적을 공격하니 대포 소리가 땅을 울려서 수십 리 안의 산이 모두 흔들렸다···낙상지(駱尙志), 오유충(吳惟忠) 등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개미처럼 성을 붙어 오르는데 앞사람이 떨어지면 뒷사람이 올라가니 후퇴하는 병사가 없었다. 적의 칼과 창이 성벽 위에서 아래를 향하여 나와 있는 모습이 마치 고슴도치의 바늘 같았다. 명나라 군대가 더욱 더 분투하니 적은 버티지 못하고 내성으로 달아났다. 칼로 베고 불로 태워 죽인 병사가 매우 많았다.
  • 『징비록』 권 3, 12월에 명이 대군을 보내다[2]다음은 평양성을 되찾은 후 일본군이 퇴각할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록인데,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명군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賊將 平行長···等 率餘衆 連夜遁還 氣乏足繭 跛躄而行···我國無一人出擊 天兵又不追之···若行長, 義智, 玄蘇等 就擒 則京城之賊自潰 京城潰則 淸正歸路斷絶 軍心洶懼 必沿海遁走 不能自拔 漢江以南賊屯 次第瓦解 天兵鳴鼓徐行 直至釜山 痛飮而已 俄頃之間 海岱肅淸 安有數年之紛紛哉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등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밤마다 달아나 한양으로 돌아갔다. 기력은 쇠하고 발은 부르터서 절뚝거리며 갔다.···우리나라 사람은 누구 하나 나서서 그들을 공격하려 들지 않았고 명나라 군대도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만약 유키나가(行長), 요시토시(義智), 겐소(玄蘇) 등을 잡았다면 한양의 적은 스스로 무너졌을 터이고, 한양의 적이 무너지면 기요마사(淸正)는 돌아오는 길을 차단당했을 터이니 적병들은 두려워하여 바닷길을 따라 달아났겠지만 빠져나가지 못하였을 터이고 한강 이남의 적진들이 차례로 와해되었을 것이다. 그러하였다면 명나라 군대는 북을 치며 천천히 나아가 곧장 부산에 도착하여 실컷 술만 마셨어도 되었을 것이고 순식간에 우리나라는 깨끗해졌을 것이니, 어찌 몇 년 동안의 어지러움이 있었겠는가.

관련 장소

기록유산과의 연관성

노드 및 관계

노드 관계 클래스 노드 설명
평양성 전투 isPartOf 사건 임진왜란 평양성 전투임진왜란의 일부이다.
평양성 전투 isRelatedTo 인물 유정 평양성 전투유정이 참전한 전투이다.
평양성 전투 isRelatedTo 인물 휴정 평양성 전투휴정이 참전한 전투이다.

함께 보기

관련 작품

  • 《징비록》: KBS1, 2015년, 배우:박병호 - 1차, 2차, 4차 평양성 전투를 다룸
  • 《불멸의 이순신》: KBS1, 2015년, 배우:박병호 - 2차, 3차 평양성 전투를 다룸
  • 《평양성》: 2011.01.27 개봉, 감독:이준익, 배우:정진영, 이문식, 류승룡

관련 장소

  • 평양성

참고문헌

웹 사이트

"평양성전투(2차)", 문화콘텐츠닷컴, 2016년 12월 26일 확인

온라인 사전

각주

  1.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인용, 2016년 12월 26일 확인
  2.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인용, 2016년 12월 26일 확인

추가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