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륭(송나라)
서도륭(徐道隆)
미상 ~ 1276년
송나라 무주(婺州) 무의(武義) 사람. 자는 백겸(伯謙)이다. 아버지를 따라 관직에 들어갔다. 담주판관(潭州判官)을 거쳐 제점형옥(提點刑獄)에 발탁되었다. 황명을 받들어 절서(浙西)의 패잔병을 처리했다. 반란군의 장수 범문호(范文虎) 등이 보낸 항복 권유 편지를 불태우고 편지를 가져온 사신을 참수했다. 원나라 병사가 임평(臨平)까지 이르자 근왕(勤王)의 명을 받아 안길(安吉)을 따라 들어와 구원했다. 공제(恭帝) 덕우(德祐) 2년(1276) 원나라 군대가 추적해와 군사가 모두 죽었을 때 함선 안에서 포로로 잡혔는데, 틈을 엿보아 아들과 손자와 함께 물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서도룡(徐道隆, ?~1276년)은 남송 말기의 항원(抗元) 장군으로, 원나라의 침공에 맞서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한 충신입니다.
주요 생애 및 업적: 1. **임전무퇴의 결심** 1275년(덕우 원년), 원군이 남하하자 서도룡은 절서제형(浙西提刑, 저장 서부의 사법·군사 담당관)으로서 항주 방어를 위해 출전했으나, 원군에 밀려 상주(常州)로 퇴각하며 방어전을 펼쳤습니다.
2. **상주 혈전** 그는 지주(知州) 요은(姚訔), 장군 왕안절(王安節) 등과 함께 상주를 사수했으나, 결성 함락 후 무석(無錫)으로 후퇴하며 계속 저항했습니다.
3. **최후** 1276년, 남송 수도 임안(臨安)이 함락되자 서도룡은 항복을 거부하고 전투 중 포로로 잡혔습니다. 원장 아술(阿朮)의 회유에도 "나는 송나라의 녹을 먹은 신하니, 죽음으로 보답할 뿐!"이라며 굴복하지 않고 처형당했습니다.
역사적 평가: 《송사(宋史)》의 **〈충의열전(忠義列傳)〉**에 이름을 올렸으며, 문천상(文天祥)·육수부(陸秀夫)와 함께 **"남송 말삼충(南宋末三忠)"**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명나라 학자 왕부지(王夫之)는 그를 **"의절이 엄연하다(節概凜然)"**며 충절을 칭송했습니다.
관련 기록: 《송사》 외에도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 등에 간략히 언급되나, 상세한 생애는 전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