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백(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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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백(徐彦伯)

(? ~ 714)

당나라 중기의 관료, 문학가. 언백은 자로, 이름은 홍(洪)이다.

연주(兗州) 하구현(瑕丘縣) 출신으로, 7살에 글을 잘 지었고 태행산(太行山) 아래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이후 하북도안무대사(河北道安撫大使) 설원초(薛元超)가 조정에 서언백을 추천했고 대책(對策)에서 급제한 뒤 영수현위(永壽縣尉), 포주(蒲州) 사병참군(司兵參軍)을 역임했다. 이때 사호(司戶) 위호(韋暠)가 사건 심리에 뛰어났고, 사사(司士) 이긍(李亙)이 문서 작성에 뛰어났고, 서언백은 문장이 뛰어나서 당시 사람들은 위호, 이긍, 서언백을 하중삼절(河中三絶)이라고 불렀다.

이후 서언백은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郞)으로 전임되었다. 성력 원년(698년), 방주(房州)에서 여릉왕 이현을 맞이했으며 급사중(給事中)으로 진위되었다. 당시 많은 왕공경사(王公卿士)가 말을 삼가지 못하고 주흥이나 내준신에게 모함을 당하자 서언백은 《추기론(樞機論)》을 지으며 이런 실태를 비판했다.

측천무후가 《삼교주영(三敎珠英)》의 편찬을 명하자 서언백은 이교와 함께 편찬 사업의 주축을 맡았다. 이후 서언백은 종정경(宗正卿)으로 전임되고 제주(齊州) 자사로 전출되었다.

신룡 원년(705년) 여릉왕 이현이 복위한 뒤 서언백은 태상소경(太常少卿)으로 전임되고 수국사(修國史)를 겸임하며 《측천실록(則天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측천실록》이 완성된 뒤 서언백은 고평현자(高平縣子)에 봉해졌다. 이후 위주(衛州) 자사로 전출되어 선정을 펼쳐 이름을 날렸고 중종이 새서를 내려 서언백을 치하하였다. 서언백은 뒤에 포주 자사를 역임하다가 입조하여 공부시랑(工部侍郞)이 되었으며, 위위경(衛尉卿)에 제수되고 소문관학사(昭文館學士)를 겸임했다.

경룡 3년(709년) 중종이 직접 남교에 제사를 지낼 때 서언백은 《남교부(南郊賦)》를 지어 바쳤다.

경운 원년(710년) 은청광록대부(銀青光祿大夫)가 더해졌고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태자빈객(太子賓客)으로 옮겼으며 소문관학사를 겸임했다.

선천 원년(713년) 병으로 인해 사직했으며 다음 해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