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혁(위서)
서혁(徐奕)은 자가 계재(季才)이고 동완(東莞) 사람이다. 전란으로 인해 강동으로 피난 갔는데, 손책(孫策)은 예을 다해 그를 임명했다. 서혁은 성과 이름을 바꾸고 간편한 복장으로 본군으로 돌아왔다. 태조가 사공을 임명되었을 때, 서혁을 불러 연속에 임명했다. 서혁은 서방의 마초(馬超)를 정벌하러 갈 때 수행하여 따라갔는데, 마초가 격파되자 군대는 돌아왔다. 당시 관중(關中)은 새로 정복되어 매우 안정되지 못했기에 조조는 서혁을 승상장사로 임명해 남겨서 서경(西京, 장안)을 지키게 했다. 서경 사람들은 그의 위신을 칭찬했다. 후에 서혁은 옹주자사로 전임되었고, 또 돌아와 동조연이 되었다. 정의(丁儀) 등은 당시에 총애를 받았는데, 모두 서혁을 모함했지만 서혁은 끝까지 동요되지 않았다.
위서(魏書)에 따르면 : 어떤 이가 서혁에게 말했다.
“사어(史魚)의 강직함을 거백옥(蘧伯玉)의 지혜와 비교하면 어떻겠습니까? 정의는 지금 신분이 높습니다. 그에게 머리를 숙이는 걸 어떻게 생각해 보시지요.”
서혁이 말했다.
“공이 총명함과 높은 덕을 갖고 있다면 , 정의가 어찌 오랫동안 그런 그릇된 행위를 하겠소! 또 부정을 갖고 있는 군주에 임용된 자에 대해서는, 나는 몸을 지킬 수 있소. 그대는 어찌 다른 일로써 나를 바르게 하오”
부자(傅子)에 따르면 : 무황제(武皇帝, 조조)부터 밝아진 것은, 최염(崔琰)과 서혁(徐奕)은 당대의 청렴한 현자이고 모두 위나라의 뛰어난 충신이다. 정의에 의해 서혁은 자리를 잃었고, 최염은 처형당하게 되었다.
그는 지방에서 나와 위군(魏郡)태수로 임명되었다. 조조가 손권을 정벌할 때 서혁을 유부장사로 전임시키며 말했다.
“그대의 충성과 절개는 고인들도 미치지 못하지만, 약간 지나치게 엄하오. 옛날 서문표(西門豹)는 가죽을 허리에 차고 그 부드러움을 보면서 자신의 엄함을 누그러뜨렸소. 무릇 유약함으로써 강함을 제압할 수 있는 자,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이오. 지금 그대에게 남아 지키는 일을 통괄하도록 한다면, 나에게는 다시 돌아볼 걱정이 없을 것이오.”
위나라가 건립된 뒤, 서혁은 상서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관리 선발을 주재하였고, 후에는 또 상서령으로 승진했다. 태조가 한중(漢中)을 정벌할 때, 위풍(魏諷) 등이 반란을 계획하자 중위 양준(楊俊)은 좌천되었다. 태조가 탄식했다.
“위풍이 감히 이와 같은 마음을 품은 건 나의 손톱과 이빨(爪牙)이 되는 신하 중에서 간사하게 거스르는 것을 멈추게 하거나 반란을 계획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제갈풍(諸葛豐)같은 사람을 얻어 양준을 대신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환계(桓階)가 말했다.
“서혁이 그러한 사람입니다.”
조조는 곧 서혁을 중위로 임명하고 손수 편지를 써서 명령했다.
“옛날 초나라(楚)에는 자옥(子玉)이 있었기에, 진문공(文公)은 초나라를 격파해 근심거리를 떨쳐 버렸고, (전한 때는) 급암(汲黯)이 조정에 있었기에 회남(淮南)에서의 반역의 음모를 좌절시켰소. 시경(詩)에서의‘나라의 믿을 사람(邦之司直)’은 그대를 일컫는 말이오!”
서혁은 수 개월간 직책에 있다가 중병으로 인해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원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간의대부로 임명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위서(魏書)에 따르면 : 문제(조비)는 항상 조정의 신하들과 회동할 때마다 한탄하며 서혁의 사람됨을 생각했다. 서혁은 아들이 없었기에, 조서를 내려 그의 친척 조카 서통(統)을 랑으로 임명해 서혁의 후사를 받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