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패
서소패(徐昭佩, ?~549)
서낭반로(徐娘半老) · 효원제(孝元帝) · 스님과의 하룻밤은 당신과의 10년밤보다 더 재미있었다.
서소패(徐昭佩): 서낭반로(徐娘半老) 풍운유존(風韻猶存) · 서소패(徐昭佩)와 가남풍(賈南風)
주광(酒狂)-술에 취해 귀신에게 청혼하려 간 서생 · 중국인들은 인생의 중요 연령대를 각각 별도의 호칭으로 부른다.
남량원제(南梁元帝) 소역(蕭繹)의 정실부인 서소패(徐昭佩, ?~549)
서소패(徐昭佩)는 동해군현(東海郡縣: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담성(郯城) 북쪽) 사람이다.
그녀의 조부는 남조(南朝)의 제(齊)나라의 태위(太尉)인 지강문충공(枝江文忠公) 서효사(徐孝嗣)이고, 부친은 남조 양(梁)나라의 시중(侍中)이자 신무장군(信武將軍)인 서곤(徐緄)이다.
517년에 서소패는 당시에 아직 상동왕(湘東王)이었던 소역(蕭繹, 효원제(孝元帝), 508~555 (47세), 양나라(梁)의 3대 황제, 재위: 552~555)에게 시집가서 상동왕비(湘東王妃)가 되었다. 소역이 황제로 등극하자, 서소패는 귀비(貴妃)로 책봉되었다.
전해지는 말로는, 서소패가 출가하던 그날, 수레를 타고 서주(徐州)에 도착했을 때, 하늘에 돌연 돌풍이 불어서 길가에 있는 집이 무너져 내리고 나무도 절단되었다. 얼마 뒤에는 비와 눈이 번갈아 가며 하늘에서 하얗게 쏟아져 끝이 아득했다.
서소패가 친정으로 돌아갈 때에, 가는 길에 또 비바람이 크게 치며 번개까지 쳤는데, 그 번개를 맞아 서주부 관아의 기둥 두 개가 두 동강이 났다. 당시 많은 사람이 이것은 불길한 징조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과연 들어맞았다.
혼인한 뒤에, 서소패는 소역과의 사이에서 아들 충장세자(忠壯世子) 소방등(蕭方等, 528~549)과 딸 익창공주(益昌公主) 소함정(蕭含貞. ?~?)을 차례로 낳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감정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한 가지 이유로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서소패의 자색은 보통이어서 소역은 그녀를 비교적 냉담하게 대했다. 다른 한 이유는,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하던 소역은 시사(時事)와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서, 종일 문사(文士)들과 문학에 심취하여 토론과 연구를 반복하며 지내며, 서소패의 처소는 오랜 기간 찾지 않았다. 소역의 냉담함은 서소패를 대단히 적막하게 만들어, 그녀는 유가 경전의 주장이나 도통(道通)을 준수하지 않는 일로 소역을 자극했다.
소역은 한쪽 눈에 눈병을 앓고 있어서 물건을 잘 볼 수 없었는데, 서소패는 자기의 불만을 발산하기 위해서, 소역에게 일부러 얼굴 반쪽만 화장한 것을 보여주어, 속칭 '반면장(半面粧)'이라는 것으로 소역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소역은 화가 났지만, 왜 그러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서소패를 징벌하지 않고, 옷소매를 뿌리치며 나가버렸다.
나중에, 술을 즐기게 된 서소패는 자기 궁에서 만취가 될 정도로 술을 자주 마셨다. 소역이 그녀를 보러 올 때마다 그녀는 곤드레만드레 취해 있었고, 어떤 때는 소역의 몸에다 토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일이 오래 지나자, 소역은 더욱 서소패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소패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기 시작하여, 지원도인(智遠道人)과 소역의 수종(隨從) 기계강(曁季江) 등과 간통했다. 그 중에서 소역의 수종 기계강은 생김새가 영준하고 행동거지가 고상하고 멋이 있어서, 서소패는 그를 매우 좋아했다.
기계강은 다른 사람에게, "백직(柏直)이란 개는 비록 늙어도 사냥을 할 수 있고, 소율양(蕭凓陽)의 말은 늙어도 빨리 달릴 수 있고, 그리고 서(徐) 마마께서는 연만(年滿: 나이가 아주 많다.)하셔도 여전히 다정(多情)하십니다"라고 감탄의 말을 했다.
이때부터 '서낭반로(徐娘半老: 서소패처럼 우아하다라는 뜻인데, '남사(南史)· 양원제서비전(梁元帝徐妃傳)'에 나오는 양원제의 후궁 서씨가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정다감하여 여전히 풍류가 남아 있는 중년부인을 빗대서 조롱하는 의미를 지닌 말)'라는 성어(成語)가 전해지게 되었다.
비록 서소패는 소역의 총애를 얻지는 못하고, 그녀 자신이 많은 연인을 가지기는 했어도, 그녀는 여전히 질투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서소패는 궁중에서 총애를 받지 못한 후궁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녀들과 함께 술의 힘을 빌려서 시름을 달래곤 했다.
일단 궁중에서 누군가 총애를 입거나, 회임한 사람이 있으면, 서소패는 사람을 시켜서 살해했다. 당시 소역이 대단히 총애하던 왕(王)씨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죽었다. 소역은 서소패가 왕씨를 독살했다고 의심하며, 속으로 서소패에게 깊은 원한을 품었다. 서소패가 소역의 총애를 못 받았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 소방등(蕭方等)도 소역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
549년에 소방등이 죽은 뒤로, 소역은 더욱 서소패를 미워하게 되었다. 그해에 소역은 서소패의 방탕한 행위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자, 곧 서소패에게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서소패도 자기가 그렇게 오랫동안 황당한 일을 해 왔기 때문에 사면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우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서소패가 죽은 뒤에, 소역은 예전의 부부의 정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출처(出妻)의 명의로 서소패의 시체를 친정인 서씨 집에 보내버렸다. 그리고 소역은 아들들에게 그녀를 위해 상복을 못 입게 하고, 직접 그녀를 강릉(江陵)의 와관사(瓦官寺) 안에 안장하게 했다.
그 후에 소역은 '탕부추사부(蕩婦秋思賦)'라는 시(詩)까지 지었는데, 서소패의 음란행위를 묘사하여 만천하에 알렸다.
소역(蕭繹)은 비록 좋은 황제는 아니지만, 우수한 문학가이다. 역사에서 문학에 지위를 득한 제왕 중에서, '사소(四蕭: 소연(蕭衍)과 세 명의 아들 소통(蕭統), 소강(蕭綱), 소역(蕭繹))'은 '삼조(三曹: 조조(曹操)와 아들 조비(曹丕), 조식(曹植))에 비길만한데, 그 '사소' 중에서도 특히 소역의 문학적 성취가 최고이고, 제자백가(諸子百家: 선진(先秦) 시대의 각종 학술 사상 유파의 총칭) 학설에 속하는 '자(子)'부(部)의 저작 '금루자(金樓子)'를 남겼다.
소역은 회화(繪畵) 수준도 매우 높아, 그가 그린 '직공도(職貢圖)'에는 남량(南梁)에 조공하러 온 소국(小國)들의 인물 형상을 기록했는데,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페르시아인이 있는가 하면, 전신에 흰 천을 걸친 흑인도 있어서, 중국의 고대조공사(古代朝貢史)를 연구하는데 지극히 진귀한 자료를 남겼다.
◈ 서낭반로(徐娘半老)
반로서낭(半老徐娘)이라고도 한다.
半: 절반 반 老: 늙을 로 徐: 천천히 서 娘: 어미 낭
중년에도 여전히 자색이 뛰어난 여자. 나이가 들어도 풍류가 있는 여자. 중년에 들어서도 염문을 뿌리는 여자. 미모의 중년부인.
소방(蕭方)의 생모는 양나라 4대 황제 소역(蕭繹, 508~554, 양무제 소연(梁武帝 蕭衍, 464~549, 재위: 502~549)의 일곱 번째 아들)의 정비인 서소패(徐昭佩)였다.
술을 좋아하는 서씨는 매번 소역의 몸 위에 음식물을 토해내곤 했다. 서씨는 투기 또한 심해 새로 들어온 첩이 임신을 할 때마다 직접 칼을 들고 가 해치곤 했다. 서진(西晉)의 진혜제(晉惠帝) 황후 가남풍(賈南風)에 비견할 만했다.
서사의 기록에 따르면 서소패의 정부로 이름을 남긴 사람은 모두 세 명이다. 화상 지원과 소역의 근신인 기계강, 흰 얼굴을 한 하미가 그들이다. 중년이 된 후 서씨의 성욕은 더욱 증대했다. 날마다 기계강을 안으로 불러들여 시중을 들게 했다. 이로 인해 용자가 뛰어났던 기계강 등은 이같이 탄식했다.
"백직(栢直: 반란을 일으킨 위나라 장수)의 개는 비록 늙었어도 여전히 사냥에 나설 수 있고, 소율양(蕭凓陽)의 말은 비록 늙었어도 여전히 준마이다. 그러나 서낭(徐娘)은 늙었는데도 오히려 더 다정하다!"
여기서 한창때를 넘긴 중년 여인을 뜻하는 '서낭반로(徐娘半老)'의 고사가 나왔다. 서씨는 추녀인데도 불구하고 남편 소역을 얕보았다. 후에 소역의 총희 왕씨가 다시 소방제(蕭方諸)를 낳았으나 얼마 후 폭사했다. 소역은 서씨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분노했다. 소방(蕭方)이 죽은 후 소역은 더 이상 서씨를 보고 싶지 않아 곧 자진하게 만들었다. 서씨는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 자진했다.
소연은 그 시체를 서씨의 친정으로 보내면서 출처(出妻: 버림받은 처)임을 분명히 했다. 이어 스스로 금루자(金樓子)를 짓고 사람을 시켜 이를 돌아가며 부르게 했다. 그는 서씨의 비행을 팻말에 적어 전각 앞에 걸어 놓았다.
중국 역사상 남편이 부인을 비판한 최초의 대자보에 해당한다.
◈ 寶山朝靄(보산조애 - 보산의 아침 안개)
寶山朝靄(보산조애 - 보산의 아침 안개)
淡抹煙鬟一髮蒼 (담말연환이발창) 안개 싸인 봉우리 실낱처럼 푸른데
遙空黛色接微茫 (요공대색저미망) 먼 하늘에 검푸르게 아스라이 닿았도다
東峯日出西峯霧 (동봉일출서봉무) 동봉엔 해 뜨고 서봉엔 안개 끼었으니
恰似蛾眉半面粧 (흡사아미반면장) 미인이 반쪽 얼굴만 분칠을 한 듯하네
- 芝峯集 卷二(지봉집 권이) 七言絶句(칠언절구) -
靄: 아지랭이 애, 아지랭이 알. 同字: 䨠
淡抹(담말): 옅게 바르다. 안개처럼 가리다. 抹: 지울 말. '지우다', '바르다', '칠하다'
鬟(환): 쪽찐 머리 환.쪽 환.산 모양. 산 빛깔.
煙鬟(연환): 푸른 산봉우리를 말한다. 여인의 아름다운 흑발
一髮(일발): 한 가닥의 머리카락.
黛: 눈썹 그릴 대. 눈썹먹 대.
黛色(대색): 산이나 수목 따위에서 드러나는 검푸른 색.
接微(접미): 닿았다.
茫: 아득할 망. 황홀할 황.
霧: 안개 무.
恰似(흡사): 거의 똑같을 정도로 비슷하게.
蛾眉(아미): 누에나방의 모양처럼 아름다운 미인의 눈썹.
半面粧(반면장): 반쪽 얼굴에만 화장하는 것을 말한다.
원문의 '아미(蛾眉)'는 미녀의 대칭이고, '반면장(半面粧)'은 반쪽 얼굴에만 화장하는 것을 말한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때 원제(元帝)의 비(妃) 서소패(徐昭佩)가 자색이 아름답지 못하여 원제에게 냉대를 받자, 서소패도 원제가 한쪽 눈이 애꾸인 것을 이유로 원제가 올 때 반쪽 얼굴에만 화장을 하고 맞이한 일이 있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참고로 당 의종(唐懿宗, 당 의종 이최(唐懿宗 李漼), 833~873, 당 제17대 황제, 재위: 859~873) 때 장응(蔣凝)이 굉사과(宏詞科)에 응시하면서 부(賦)를 4운(韻)만 쓰고는 나가버렸는데, 사람들이 그 글을 보고 '못생긴 여자가 만면에 단장을 해도, 서비가 반 화장한 것만 못하다'(臼頭花鈿滿面, 不若徐妃半粧.(구두화세만면, 불약서비반장)'라고 하며 칭탄(稱歎: 칭찬하고 감탄함)한 일이 있다.
'南史 卷12 元徐妃列傳(남사 권 12 원서비열전)' '唐摭言 載應不捷聲價益振(당척언 재응불첩성가익진)' -
◈ 효원제(孝元帝, 508~555 (47세), 양나라(梁)의 3대 황제, 재위: 552~555)
남북조시대 양나라(梁)의 3대 황제.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효원황제(孝元皇帝).
휘는 소역(蕭繹). 자(字)는 세성(世诚), 아명(소자(小字))은 칠부(七符).
재위 기간 동안 승성(承聖)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천감(天監) 7년(508) 8월 6일(508년 9월 16일)에 태어났으며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 464~549 (85세), 양(梁)의 초대 황제, 재위: 502~549)과 완(원)령영(수용완령영(修容阮令嬴), 477~543, 원래는 석씨 성을 가진 궁녀로 무강후 석영보(石靈寶)와 진씨(陳氏) 사이의 딸이었다.
남제 시안왕 소요광의 시첩이었다가 소요광이 죽자 동혼후 소보권의 후궁이 되었다. 그리고 소보권이 죽고 남제가 멸망한 후 소연의 후궁이 되어 아들을 낳자 소연이 무척 기뻐하며 '완(원, 阮)'이라는 성과 '영영(令嬴)'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사이에서 태어난 7남이다. 7살에 상동군왕(湘東郡王) 에 책봉되었다.
태청 원년(547) 정월, 형주, 옹주 등 9주 군사 도독을 맡고 형주자사가 되었다.
태청 3년(549), 하남왕 후경(侯景, 503~552)이 대란을 일으키고 소연을 유폐시켰다가 소연이 굶어 죽자 소역은 작은 아들을 우문씨가 권력을 잡고 있던 서위에 볼모로 보내고, 고씨의 북제와 화의를 맺었다. 이에 서위는 볼모를 받지 않고 형제 관계를 맺길 원했고 북제는 소역을 양나라 상국으로 임명했다. 6월, 소역은 후경을 토벌할 작정으로 군대를 모집하고 하동왕, 상동자사였던 소예에게 3번이나 사람을 보내 식량을 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소예가 모두 거절하자 소역은 무력으로 소예를 공격했다. 이에 소예의 아우였던 악양왕, 옹주자사 소찰[3]은 소역의 근거지였던 강릉을 공격해서 형 하동왕 소예를 구원하려다가 오히려 패배하고 도망쳤다. 그래서 소찰은 서위에 구원을 보내 번국이 되기를 원했다.
대보(大寶) 원년(550) 4월, 평남장군 왕승변이 장사를 함락시키고 소예를 죽였다.
대보(大寶) 2년(551) 6월, 후경은 파릉에서 대패하고 건강으로 도주했으며 소역은 군사를 이끌고 계속 추격했다. 7월, 후경은 간문제 소강을 협박하여 예장왕 소동에게 양위하게 하고 소동을 황제로 세웠다가 11월, 소동을 폐하고 스스로 한(漢)나라 황제가 되었다.
대보(大寶) 3년(552) 3월, 왕승변과 시흥 태수 진패선의 공격을 받고 후경은 가죽 주머니에 두 아들을 넣어 100여 기를 데리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배를 타고 장강을 건너 북쪽으로 도주할 생각이었지만 추격병이 계속 쫒아왔다. 이에 빨리 도주하기 위해 자기 자식들을 강물에 집어 넣고, 나름대로 오래 갔지만 지쳐 잠든 사이에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한고조 유방은 마차에서 자식들을 던져도 마부가 주워줬는데 부하들에게 피살당한 후경 클라스
후경의 부하들은 그의 시체를 소금에 절인 후, 그의 처자와 함께 건강으로 보냈다. 왕승변은 후경의 머리를 베어 강릉으로 보내고 그의 팔은 북제(北齊)로 보냈다. 이는 후경이 북제의 전신인 동위(東魏)에서 반역하여 이탈한 장수이므로 북제와의 화평을 위해 그를 죽였다는 증거로 보낸 것이다. 그리고 후경의 시체는 건강 거리에 매달아놓았으며 그의 처자는 모두 참살되었다. 매달아놓은 그의 시체는 백성들이 달려들어 붙어 있는 살을 모두 뜯어먹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왕망보다 더 처참했다. 늦게 도착해 살을 먹지 못한 백성들은 억울해하다가 남은 뼈를 불태워 물에 태워 마실 정도로 후경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했다. 후경의 머리는 강릉에 있던 소역이 받아서 후경에 의해 폐위당하여 비참하게 아사한 아버지 무제 소연의 원혼을 달래는 제물로 사용되었다. 그 다음에는 3일 동안 강릉 거리에 매달았다가 삶아서 색칠한 다음 무기 창고에 보관했다. 이것은 후경이 저지른 악업의 크다큰 대가였다.
후경의 난은 평정되었으나, 양나라의 국력은 크게 쇠약해지고, 영토의 반 이상이 서위와 북제에 넘어갔다. 파촉 지방, 형주 지방, 장강 이북 지방을 서위와 북제에 상실함으로써 영토는 장강 이남으로 한정되었다.
4월, 황제를 칭했던 무릉왕, 태위, 익주 자사 소기는 소역에게 화해를 구걸했으나, 거절당하고 7월에 토벌을 당한 후에 다음해(553) 피살되었다.
11월, 소역은 강릉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폐허가 된 수도 건강 대신에 자신의 근거지 강릉으로 천도했다. 그는 강릉을 건강을 모델로 그대로 개축했는데 성벽의 표격, 대전, 성문 이름까지 모두 건강과 같았다. 그는 효성이 지극해 아버지가 죽은 정전에서 일을 보지 않고, 용광전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승성(承聖) 2년(553) 3월, 서위(西魏)의 사신을 접견했다. 하지만 대우가 북제의 사신보다 못하다는 구실로 서위의 승상이자 권력자였던 우문태는 불만을 품었다. 이를 구실로 살해당한 소예의 동생이었던 옹주 자사 소찰의 지지와 지원하에 5민 명을 출병시켜 원제 소역을 공격했다. 소역의 조카뻘이었던 소찰은 강릉과 가까운 요충지 양양을 서위에게 스스로 바치고, 서위군과 함께 형주 강릉을 공격해왔다. 소역은 진양문에서 열병하고 비파문으로 친히 나가 항전하였다.
승성(承聖) 3년(554) 11월, 강릉이 포위되고 외성 서문이 열려서 서위군이 들어오자 소역은 절망하며 "10,000권의 책을 읽고 오늘 이렇게 일생을 마치는구나. 죽을 바에 책들이 무슨 소용인가? 문무의 도가 오늘 밤에 끝장나는구나."라면서 내성 안 동죽각전에 비치된 고금도서 14만 권을 모두 불살라 없애고 내성으로 퇴각했다. 이것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보다 심하고 항우의 함양 파괴에 비견할 만하다. 결국 12월, 내성마저 함락되면서 사로잡혀 궁중 주의고에 구금되었다가 머지않아 소찰의 지시에 의해 결국 피살되었다(승성(承聖) 3년(554) 12월 19일).
소찰은 천으로 그의 몸을 감아 부들돗자리에 싸고 흰 띠로 묶어 강릉 진양문 밖에 매장했으며 그가 죽을 때의 나이는 47세였다. 황제 임에도 불구하고 천으로 싸인 돗자리로 감싸 매장된 것은 그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보여준다.
서위는 소찰을 황제로 세우고 강릉성을 두 구역으로 나누어 동쪽에는 소찰을 거주하게 하고, 서쪽은 강릉 총관이 지휘하는 서위군을 주둔시키면서 서위의 괴뢰 국가인 후량을 탄생시켰다. 나중에 서위가 멸망하고 우문씨의 북주가 들어섰지만 서위의 역할은 그대로 북주에게 계승되었다. 북주에서 사신을 보내 사소한 일로 소찰을 꾸짖자 소찰은 충격으로 병을 얻어 죽었다. 소찰의 아들 소규가 즉위하자 북주와 관계가 좋아지면서 신뢰를 얻어 서쪽에 있던 강릉 총관과 북주군은 철수했다. 그러나 북주가 멸망하고 양씨의 수나라가 들어서고 소규의 뒤를 이은 소규의 아들 소종 때 수나라는 다시 강릉 총관과 병력을 주둔시킨다. 결국 수나라는 남조의 진나라를 치기 앞서 군대를 보내 후량을 멸하면서 양나라는 완전히 사라진다. 그 후 수말당초 양의 황족 소선 등에 의해서 양나라 부흥 운동(후소량)이 전개되었으나, 당나라가 세워지면서 모두 진압되어 후소량마저 멸망된다.
▲ 평가
소역은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이미 대여섯 살 때부터 사서오경을 암송하여 무제 소연의 칭찬을 받았다. 장성해서는 많은 책을 읽었고, 눈병으로 한쪽 눈을 잃고도 그만두지 않았다. 또 책 수집을 즐겨 많은 책들을 모아 창고에 보관했는데 이것은 그의 만행으로 없어졌다.
서화, 문장에 뛰어나 저작을 남겼으며 조서도 붓만 들면 바로 완성했다. 현재 남아있는 <양직공도(梁職貢圖)>가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단, 소역이 그린 원본은 남아 있지 않고 <역대제왕도권(歷代帝王圖卷)>으로 유명한 당나라 화가 염입본(閻立本, 601~673)의 모사본도 남아있지 않다. 현재 것은 북송 시대의 모사본이다.
하지만 나약하고 원대한 계획이 없었으며 의심이 많고 과단성이 없었다. 황로 사상을 숭상해서 강릉이 서위군에게 포위됐을 때도 태평스럽게 <노자(老子)>를 강의하여 백관들은 갑옷을 입고 그의 강의를 들어야 했다. 또 여색은 즐기지 않았지만 미신을 깊이 믿어 금기하는 것이 많았다. 벽이 무너지거나 집이 기울어져도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리를 미뤘다. 억지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시기심이 많았으며 잔인했다. 강릉이 포위당했을 때 감옥에는 수천 여명의 사형수들이 갇혀 있었는데 관원은 그들을 풀어 군사로 충당시키고, 무기를 주어 싸우게 하자고 건의했으나 오히려 그들을 모두 몽둥이로 때려 죽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원제 소역이 곧 죽는 바람에 이것은 집행되지 않았다.
▲ 후예와 여담
소역의 아들들은 소역과 함께 대부분 서위군 또는 후경에게 피살되었거나 아니면 요절했다. 원제 소역의 남자 자손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소역의 장남 소방등의 외아들이었던 손자 소장(蕭莊, 548~577)이다. 소장의 아들이자 소역의 증손자가 훗날 당태종 시절 감찰어사를 지냈던 소익이다. 당 태종은 왕희지 글씨 매니아였는데 그 중 1품이라는 난정서(蘭亭序)를 얻고 싶어했다. 사실 난정서는 왕희지(王羲之, 321~379) 사후 대대로 후손에게 전해져 오다가 7대손이었던 지영에게 귀속되었다. 지영은 영흔사 승려였기 때문에 그가 100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난정서는 그의 제자 변재가 가지게 되었다. 변재는 나름 스승의 가보이자 유품을 지키기 위해 상자에 넣고 영흔사 대들보에 몰래 구덩이를 파서 숨겨두었다. 마침 월주 영흔사 변재 선사가 이를 가지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그를 불러 캐물었으나, 그는 자신의 스승 지영이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른다고 시치미뗐다. 당 태종은 그의 의도를 깨달았지만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돌려보내고 신하들과 의논했다. 이에 방현령은 소익을 추천했다.
소익은 영흔사로 가서 변재를 만나 바둑, 거문고, 투호 등 잡기로 그와 금방 친해졌다. 소익은 자주 영흔사에 방문하면서 친분이 어느 정도 쌓이자 자신의 증조 할아버지 소역이 그린 양직공도를 꺼내 서화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소익은 난정서 이야기로 화제를 옮겼고 소익은 계속된 전란으로 난정서가 사라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변재는 도발에 걸려서 스스로 꺼내서 보여주고 말았다.
이에 변재가 잠시 절을 비운 사이에 칙명을 빌미로 난정서를 받아내고, 이것을 장안으로 급히 보냈다. 이 공으로 소익을 추천한 방현령은 금채 1,000단을 받았고 소익은 원외랑으로 승진하며 많은 상품과 장원, 저택을 받았다. 변재는 황제를 속인 죄가 있었으나, 80이 넘은 고령이었고, 난정서를 얻은 기쁨에 겨워있던 당 태종은 용서하고 오히려 비단 3,000단과 쌀 3,000석을 값으로 쳐주었다. 하지만 변재는 그것을 3층 보탑 건립비로 사용하고, 스승의 유품을 잃은 자신을 책망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머지않아 숨을 거두었다. 그 후 난정서는 당 태종의 소릉에 배장되었으나, 훗날 당나라 멸망 후 군벌 온도가 도굴하면서 유실되고 말았다.
▲ 가족
원제(元帝)에게는 정비 서씨와 귀빈(貴嬪) 왕씨(王氏), 귀인(貴人) 원씨(袁氏), 귀비(貴妃) 하씨(夏氏), 양인(良人) 왕씨 등의 후궁이 있었는데, 서씨의 경우 얼굴이 박색이라는 이유로 3년에 한 번 정도밖에 찾지 않을 정도로 멀리했다.
이에 서씨는 원제가 행차한다는 말을 듣고 얼굴 화장의 반을 지우고 원제를 맞았고, 원제가 왜 얼굴 반쪽만 화장했느냐고 물었더니 "당신은 어차피 눈도 하나밖에 없어서 내 얼굴 다 못 볼 텐데 얼굴 다 화장해서 뭐하나요."라고 울분에 찬 대답을 해 원제의 분노를 샀다.
또 서씨는 술을 좋아해서 원제의 옷에 구토를 한 적도 있고 원제가 멀리하는 후궁과는 자주 술을 마시며 가깝게 지냈지만 원제의 총애를 받아 그의 아이를 낳은 후궁은 자신이 칼을 들고 찾아가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후궁들만 찾는 원제에게 항의라도 하듯 형주(荊州)의 요광사(瑤光寺)라는 절에 있는 지원(智遠)이라는 승려와 사통하기도 했고, 남편의 측근으로 미남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기계강(曁季江)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했으며, 하휘(賀徽)라는 자의 용모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그를 보현니사(普賢尼寺)라는 절로 불러다 간통하기도 했다.
때문에 후궁 귀빈 왕씨가 죽자 원제는 서씨 때문에 왕씨가 죽었다고 책임을 돌렸고, 서씨 소생의 아들인 소방등(蕭方等)까지도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 소방등은 549년 후경의 토벌에 반대하던 상주자사 소예와 싸우다 패하고 죽었고, 이때 원제는 아들의 죽음에 별로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아들이 죽은 것에 충격을 받아 병을 얻은 서씨는 아들이 죽은 해 5월에 원제로부터 자결을 명령받고 우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 스님과의 하룻밤은 당신과의 10년밤보다 더 재미있었다.
스님도 인(人)이지 신(神)이 아니다. 인간의 칠정육욕(七情六欲)이 스님에게도 있기 마련이다. 인간에게는 '본연의 얼굴', '자제된 얼굴', '승화된 얼굴'이 있다. 수요에 따라 때로는 자제된 얼굴, 때로는 승화된 얼굴을 나타내지만 본연의 얼굴은 크게 다를 바 없다.
프로이드의 책 '정신분석법'에 이렇게 씌어 있다.
무측천 황제가 한번은 고승 다섯을 불러 “당신들은 색욕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였다. 신수(新秀), 현약(玄約), 노안(老安), 현색(玄賾) 네 고승은 없다고 잡아뗐다.
유독 선선(詵禪)만이 "색욕이 있다. 살아 있는 한 있고 죽어야 없다”라고 답하였다. 남조 송의 제종(濟宗) 스님은 심지어 "술, 고기, 도둑질, 오입질은 불교를 터득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라고 말했다.
중국의 사찰은 남자스님의 묘(廟)와 비구니의 암(庵) 두 가지로 나뉜다. 보통 암은 묘에서 반경 1㎞ 안에 있다. 편리한 연애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고 보면 스님의 금욕은 체면· 자제· 승화된 얼굴에 불과하고 사실은 세속사람과 비슷한 생활을 한 스님도 적지 않았겠다.
문헌 중 가장 이른 스님의 정사에 관한 기록은 남조 양원제(梁元帝, 재위: 552~555)의 비녀 서소패(徐昭佩)가 요광사(瑤光寺)의 스님 지원도인(智遠道人)과 사통한 것이다. 중국 역사상 스님과 궁궐 안 요인과 사통한 예는 너무나 많다. 무측천(武則天) 여황제가 대표적 인물이다.
무측천이 처음 사통한 남자는 스님이었다. 당태종(唐太宗, 598~649 (51세), 당 제2대 황제, 재위: 626~649 (23년간))이 사망한 후 비녀 무측천은 감업사(感業寺)의 비구니가 되어 지척 백마사(白馬寺)의 스님 풍소보(馮小寶)와 사통하였다. 황제가 된 후에 풍소보는 백마사 주지로 됐고 후궁에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설회의(薛懷義)라는 성명도 하사받았다.
당태종의 고양(高陽)공주와 무측천의 태평(太平)공주는 다 스님과 사통하였다.
이욱(李煜, 愍皇帝(민항제), 937~978(41세), 남당 제3대 황제, 재위: 961~975(약 14년))은 남조 후당(後唐) 망국의 황제이다. 한번은 그가 변복 차림으로 기생집에 가서 장석(張席)이란 스님과 부딪쳤다. 장석이 먼저 왔으므로 존중하여 자기가 정사를 나누려던 기생을 장석에게 양보하고 살며시 떠나버렸다. 뿐만 아니라 ‘원양사의 스님은 풍류의 불법을 수련하네’라는 시를 써놓았다. 스님· 황제· 기생 간의 로맨틱한 정사의 일화이다.
여인들은 왜 스님과 사통하기를 좋아하는가? '수호전'의 두령 양웅(楊雄)의 처 반교운(潘巧雲)은 스님 배여해(裵如海)와 사통하다가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죽기 직전 반교운은 양웅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배 스님과의 하룻밤이 당신과 10년 밤보다 더 재미있었다."
스님에게 정말 이렇듯 큰 매력이 있을까? 이는 '인자견인(仁者見仁), 지자견지(知者見智: 어진 사람은 어질다고 보고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로운 것으로 본다. 같은 사물이라도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르거나 각자 자신의 견해를 가짐을 의미함.)'에 불과하며 누구도 정답을 줄 수 없는 주제이겠다.
◈ 서소패(徐昭佩): 서낭반로(徐娘半老) 풍운유존(風韻猶存)
553년의 가을날, 후량(後梁)의 수도인 강릉(江陵, 지금의 호북성 형주)의 대로에는 도처에 쇠잔한 낙엽이 쌓여 있었다. 몇몇 내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마차를 하나 끌고 나타났다. 마차위에는 물기에 젖어 있는 여자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그들은 시중(侍中)인 서곤(徐緄)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다면 마차위의 시신은 누구인가? 왜 마차를 끄는 사람이 모두 궁정의 내시인가? 죽은 자를 잘 대접해주던 전통사회에서 왜 그녀를 적시에 매장해주지 않았을까? 이야기하자면 이 죽은 사람은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그녀는 바로 "서낭반로, 풍운유존"이라는 고사의 여주인공이며, 정사에 그 이름이 남아있는 유명한 여장부 서소패이다. 또한 망처이혼안(亡妻離婚岸: 죽은 처와 이혼한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도대체 어떤 원한이 있기에, 남편으로 하여금 결발지정(結髮之情)도 잊게 만들었을까? 도대체 어떤 원독이 있어서 한 남자로 하여금 이처럼 악독하게 이미 죽어버린 약한 여인을 대하게 만들었을까?
서소패의 남편은 소역(蕭繹)이다.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의 일곱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눈 하나를 다쳐서 멀었다. 이런 생리상의 결함은 그로 하여금 무거운 심리적 부담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서 외눈때문에 다른 사람을 종종 시기하곤 했고, 다른 사람들과 불쾌한 일이 많이 벌어졌다. 서소패도 명문규수이다. 비록 용모가 아주 예쁘지는 않았지만, 오관단정하고 개성이 있는 여인이었다. 황실로 시집간 후, 처음에는 남편의 외눈을 싫어하지 않았다.
소역은 문학청년이었다. 그의 마음은 여자에게 있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글을 읽고 글을 쓰고 학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2,3년만에 서소패와 잠자리를 한번 같이한다. 서소패가 1남1녀를 낳은 후, 더이상 그녀를 찾지 않는다. 부부생활이 원만하지 못했다. 서소패는 규방에서 외로웠고, 자연히 원망이 많이 쌓이게 되어 보복할 기회를 찾게 된다. 그래서 '반면장(半面粧, 얼굴 반쪽만 화장하는 것)'이라는 방식으로 남편이 외눈인 것츨 조롱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소역은 원래 마음에 병이 있는 자이다. 이런 우스개를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반면장)을 보고는 대노하며 나가버렸다.' 몇번 이런 일이 반복되자 그는 더 이상 서소패를 찾아가지 않게 되고, 부부관계는 유명무실해진다.
후경(侯景)의 난때, 소역은 기회를 틈타 거병하여 후경을 격패시킨다. 그리고 강릉에서 황제에 오른다. 역사상 양원제(梁元帝)라 칭하게 된다. 연호는 승성(承聖)으로 고친다. 서소패도 황비(皇妃)로 승격된다. 지위가 올라가니 담량도 커진다. 항상 기회를 보아 우울함을 풀곤 했다. 그녀는 먼저 요광사(瑤光寺)의 대화상 이지원(李智遠)과 사통한다. 나중에 양원제의 수종관(隨從官) 기계강(暨季江)은 영준하고 멋있었다. 그래서 자주 사적으로 기계강을 불러서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곤 했다.
기계강은 말이 많은 자였다. 사람들과 만나면 널리 광고하고 다녔다.
"자직(柘直)의 개는 비록 늙었지만, 여전히 사냥을 할 줄 알고, 소율양(蘇溧陽)의 말은 비록 늙었지만 여전히 웅준하다, 서낭은 비록 늙었지만 아직도 정이 많다."
이것은 서소패를 말이나 개에 비유한 것이다. 참담하기 그지없는 소리다.
이것이 바로 '서낭반로(徐娘半老) 풍운유존(風韻猶存)'의 출처이다.
항간의 소문은 널리 퍼져갔지만, 기이하게도 양원제만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 몰랐을까? 아니다. 그는 기회를 기다린 것이다. 만일 부인이 바람을 피워서 처를 죽였다고 한다면 체면이 뭐가 될 것인가? 만일 다른 죄명을 찾아서 죽여버린다면, 그건 상관이 없다.
시간이라는 것은 여자의 가슴골과 같다. 모으기만 하면 생겨난다. 기회는 여성의 지스팟과 같다. 인내심을 가지고 찾으면 언젠가 찾을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간과 기회가 만났다.
소역의 애비 왕씨가 아이를 낳자마자 돌연 죽는다. 그래서, 소역은 이 여인이 서소패에게 독살당했다는 핑계를 대고 서소패에게 자살을 명한다. 임금이 죽으라면 신하는 죽는 수밖에 없다. 서소패는 어절 수 없이 우물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관례에 따르면, 황비가 죽었을 때 죄가 있든 없든 장지를 찾아서 매장해주어야 한다. 시신을 황야에 버려둘 수는 없다. 죽은 자를 잘 대접하는 것은 살아있을 때 아무리 큰 잘못이 있더라도, 죽고 나면 따질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녀의 죄는 극악무도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양원제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그는 아직 화가 덜 풀린 것이다. 알 수 없는 노화가 가슴 속에서 끓어 올랐다.
그 후, 그는 아주 특이한 일을 벌인다. 사람을 시켜 서소패의 시신을 우물에서 건져올리게 한 후, 후비의 예로 안장하지 않고, 직접 서소패의 친정으로 돌려보낸다. 즉 이 글의 첫머리에 언급한 장면이 그것이다. 그 의미는 바로 휴처(休妻)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하자면 이혼이다. 죽은 사람을 버리다니 이것은 아마도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일일 것이다. 아마도 양원제같은 자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이렇게 되니 서소패는 참담해진다. 친정으로 돌아가서 다시 매장되었는데, 묘비에는 뭐라고 쓸 것인가? 그녀는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된다. 이것이 끝은 아니다. 어디에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화가 남아있었는지 소역은 <탕부추사부(蕩婦秋思賦)>라는 글을 써서 서비의 추악한 일을 까발린다.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탕지지별십년(蕩子之別十年), 창부지거자련(倡婦之居自憐)", "상사상망(相思相望), 노원여하(路遠如何)! 빈표봉이점란(鬢飄蓬而漸亂), 심회수이전탄(心懷愁而轉嘆), 수영취미렴(愁縈翠眉斂), 제다홍분만(啼多紅粉漫)"
아...왜 죽은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하는가?
망처 서소패와 이혼한 후, 양원제의 좋은 시절도 끝이 난다. 다음 해, 즉 554년 11월, 강릉성은 서위(西魏)의 우문태(宇文泰)에게 함락되고, 소역도 포로로 잡혀 죽는다. 성이 함락되기 전에, 그는 장서 14만권을 불태워버린다. 역사상 진시황의 분서갱유보다 더욱 참혹한 문화파괴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글을 너무 많이 읽어서 오늘날의 화를 불러왔다"고 말하면서, 이런 자이니 죽은 처에게 그렇게 대한 것도 이해는 된다.
◈ 서소패(徐昭佩)와 가남풍(賈南風)
남북조(南北朝) 시대 남제(南齊)의 관리였으나, 502년에 남제의 7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제화제(齊和帝) 소보융(蕭寶融, 재위: 501~502)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남양(南梁)을 건립한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 464~549, 재위: 502~549)이 아사한 지 얼마 안 된 549년 8월, 양나라에서 광주부중직병참군(廣州府中直兵參軍), 서강독호(西江督護), 고요태수(高要太守) 등을 지낸 진패선(陳覇先, 503~559, 자는 흥국(興國), 법성(法生))이 후경(侯景, 503~552, 자는 만경(萬景))에게 투항하려 한 광주자사 원경중을 습격해 살해한 뒤 종실인 정곡후 소발(蕭勃)을 광주자사로 삼았다. 이는 남조 최후의 왕조인 진(陣)나라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당시 휘하에 대군을 거느리고도 건강성이 무너지는 것을 방관했던 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 508~554, 소연의 일곱 번째 아들로 양나라 4대 황제)은 계속 후경 토벌을 결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세자 소방(蕭方)이 조카인 하동왕(河東王) 소예(蕭譽)에게 습살을 당하자 곧 휘하의 경릉 태수 왕승변과 신주자사 포천에게 명해 서로 협력해 상주의 소예를 치게 했다.
원래 소방은 소역의 아들이기는 했으나 전혀 부왕의 총애를 입지 못했다. 소방의 생모는 소역의 정비인 서소패(徐昭佩)였다. 서씨는 남조 송나라의 명신인 서효사(徐孝嗣)의 손녀로 517년 소역에게 시집왔다. 서씨를 맞아들이는 날 큰 바람이 불어 집의 기둥이 부러졌다. 얼마 후 다시 싸라기눈이 뒤섞인 비가 휘몰아쳐 장막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소역을 비롯한 주변 사람 모두 이를 상서롭지 못한 조짐으로 보았다. 화촉이 동방을 밝히는 밤에 보니 과연 서씨는 추녀인 데다 투기가 극심했다. 양가 규수의 모습은 전혀 없고 음탕하기 짝이 없었다. 술을 좋아하는 서씨는 매번 소역의 몸 위에 음식물을 토해내곤 했다. 서씨는 투기 또한 심해 새로 들어온 첩이 임신을 할 때마다 직접 칼을 들고 가 해치곤 했다. 서진(西晉)의 진혜제(晉惠帝_ 황후 가남풍(賈南風)에 비견할 만했다.
가남풍은 작은 키에 피부가 검고 추한 용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당시 서진의 초대 황제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 236~290, 재위: 265~290, 사마소(司馬昭, 211∼265)의 아들이며 사마의(司馬懿)의 손자)은 아들 사마충(司馬衷, 259~306)의 배필로 위관의 딸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가남풍과 비교해 보아도 위씨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남풍의 모친 곽씨의 뇌물을 받은 무원황후(武元皇后, 237~274)와 대신들이 하나같이 가남풍을 추천하자 무제도 어쩔 수 없이 가남풍을 며느리로 맞았다. 가충은 본래 딸들 중 가장 외모가 나은 가오(賈午)를 시집보내려 했지만 가오의 발육이 늦어 혼례복을 입힐 수가 없었기에 열다섯이 된 가남풍을 택했다.
무제는 아들 사마충의 지능이 남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글로 시험해보고자 했다. 가남풍은 이를 알고 장홍張泓을 불러 고문들을 이용한 답안을 작성하게 하고 사마충으로 하여금 이 답안을 베껴 쓰게 했다. 무제는 사마충의 답안을 보고 만족하여 후계자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남풍은 성격이 잔혹하고 질투심이 강해 사마충의 다른 후궁들을 잔혹하게 죽였다. 무제는 이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가남풍을 냉궁에 유폐하려 했지만 무도황후를 비롯한 측근들이 아직 태자비의 나이가 어려 저지른 짓이라고 감싸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한편으로 가남풍이 후계자를 낳지 못하는 것을 걱정한 무제는 자신의 시녀인 사구를 아들에게 보냈고 사구가 무사히 아들을 낳자 크게 기뻐하며 사마충을 태자에서 폐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290년 무제가 죽고 사마충이 혜제로 즉위하자 가남풍은 황후가 되었고 사구의 아들 사마휼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가남풍은 그동안 여러 번 자신을 도와준 태후(무도황후)의 부친 양준(楊駿)을 비롯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양씨 일족을 숙청하고 태후를 영녕궁에 유폐시켰다. 그 뒤 태후를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금용성에 가두어 굶겨 죽였다.
가남풍은 젊은 남자들을 궁 안에 불러들여 부정한 짓을 저질렀지만 혜제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지는 못했다. 혜제와 사구 사이에서 태어난 태자 사마휼(司馬遹)은 가남풍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정사에 관심이 없는 척했다. 공부를 게을리 하고 조회에도 출석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궁중에서 노점을 벌이며 장사를 하는 척하기도 했다. 태자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사마휼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가남풍에게 태자를 폐위시킬 빌미를 제공했다. 가남풍은 여동생 가오와 그 남편 한수(韓壽)의 아들 한위조(韓慰祖)를 데려와 자신과 혜제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가남풍의 모친 곽씨는 임종에 앞서 사마휼에게는 해를 끼치지 말라고 타일렀지만 가남풍은 이를 듣지 않았다. 사마휼을 제거하기 위해 가남풍은 그에게 신경을 마비시키는 술을 먹이고 혜제와 자신을 죽이겠다는 내용의 글을 쓰게 했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사마휼은 폐서인으로 강등되었고 허창으로 압송되었다. 가남풍은 자신의 정부인 태의령 정거에게 독약을 짓게 해 사마휼을 독살하려 했으나 이에 실패하자 절굿공이로 때려 죽였다.
이처럼 전횡을 일삼던 가남풍은 무제의 숙부 조왕 사마륜(司馬倫, 249~301)과 손수 등에 의해 실각했다. 혜제는 가남풍을 폐서인으로 강등시켜 유폐시켰고 사마륜은 상서 유홍을 보내 가남풍에게 독이 든 술을 내렸다. 가남풍은 사마륜을 역적이라 비난하고 독주를 마신 뒤 죽었다.
◈ 주광(酒狂) - 술에 취해 귀신에게 청혼하려 간 서생
절강(浙江) 가흥(嘉興) 사람 중에 양생(梁生)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다. 그는 천성이 소심했지만, 술에 취했다 하면 무서울 게 없었다. 평상시에는 손님과 이야기하는 것조차 부끄러워 여자아이처럼 한마디조차 하지 못하다가도 술을 좀 많이 마셨다 하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하고 행동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주정꾼'으로 불렀다. 양생은 중년에 처를 잃고 재혼하려 했지만 당장 적당한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가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데 취기가 오르자 한 친구가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아무개 태사(太史)에게 꽃처럼 아리따운 딸이 하나 있다는데 열다섯의 나이에 죽어버렸다는군. 그 여자의 관은 오성사(五星祠)에 보냈다는데 달이 높이 뜨고 서늘한 바람이 불 때마다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네. 자네는 아내가 없으니 그 여자를 찾아가 보는 건 어떤가?"
이때 이미 취할 대로 취한 양생은 이 말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 말했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리고 농담처럼 말했다.
"여기 계신 친구들이 친절하게도 중매를 서주시니, 거절할 수야 없지. 내일 아침 술병을 들고 그곳으로 와서 내 결혼을 축하해주게."
양생이 정말로 떠나려 하자 친구들은 손뼉을 치며 놀려댈 뿐 그가 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정말 오성사에 간다고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만무했다.
양생은 밝은 달빛을 등불 삼아 비틀대며 오성사로 향했고 자정이 다 되어 도착했다. 사당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들킬까 봐 그는 옆으로 돌아가 낮은 담을 타고 몰래 들어갔다. 여자의 관이 서편에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기에 양생은 관이 있는 곳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바로 그때 음산한 바람이 한바탕 불어왔다.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양생은 이미 술도 반쯤 깬 상태라 겁이 덜컥 났다.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엄습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진한 술향기가 났다. 양생이 코를 벌름대며 향기를 따라가자 회랑 아래에 술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는 술병을 들고는 곧바로 들이켰다. 술이 정말 향기로웠다. 양생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들이켰다. 술에 취한 양생은 갑자기 자기가 이곳에 온 이유가 떠올리고는 관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관을 두드리며 말했다.
"저 양생은 중년에 아내를 잃고 지금껏 배우자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말하길 당신이 가끔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더군요. 제게 모습을 한 번만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관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양생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당신은 썩은 나무처럼 죽어 재가 되어서 다시 탈 수도 없겠군요. 오늘 제가 헛걸음한 듯합니다."
양생이 돌아서서 걸으려는데 갑자기 두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때 관 안에서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낭군께서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곧 나갈게요."
그리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소리와 함께 양생의 옆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의 얼굴은 병색이 짙어 새하얬고 피부는 모두 벗겨져 온전한 사람의 형태가 아니었다. 바짝 말라 쪼그라든 여자의 손이 자신의 손을 꼭 잡자 양생은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양생은 아직 취한 상태였는지 별로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속았군. 당신은 친구들이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르군요!"
양생은 손을 휘저으며 여자를 쫓았다. 여자는 부끄러운 얼굴로 한참을 서 있다가 말했다.
"실망스럽군요. 결국 당신은 색만 밝은 사람이었어요. 좋은 술을 낭비했네요."
그러고는 분을 못 이기고 떠나버렸다. 이윽고 콰르릉 소리와 함께 관이 닫혔다. 양생은 깜짝 놀라 식은땀을 흘렸고 냉수로 세수한 듯 술기운도 달아났다.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온 양생은 그 뒤로 완전히 술을 끊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가 취한 모습을 더는 보지 못했다.
외사씨가 말했다.
병으로 죽은 사람은 사후에 비쩍 말라비틀어진 모습이 매우 흉측하다. 왕왕 소설 속에서는 아름다운 말로 죽은 자를 표현하고 있으나, 이는 사물의 이치와는 맞지 않는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옛날 사람들이 묘사가 틀렸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 나온 '앵앵회(鶯鶯灰)'라는 글을 보면 문장이 매우 애절하고 아름다운데 여기에 소개한다.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는 본래 오랜 시간을 방에서만 지낸다. 하지만 무정한 세월은 그녀들에게만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서낭(徐娘)은 시간이 지나 점차 늙어가니 한없이 풍류를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소소소(蘇小小)는 일찌감치 죽었지만 결국은 아름다운 몸도 사라졌으니 '주림(株林)'의 하희(夏姬)처럼 세 차례나 늙었다가 어린이도 돌아가 한 차례 더 결혼할 수 없었다. 박릉(博陵)의 최앵앵(崔鶯鶯)도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그 몸이 물 아래에 묻혔다. 최앵앵이 처음에 교태를 부리며 거울을 마주한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사랑해 마지않았지만, 나중에 병에 걸려 아름답게 꾸미지 않은 그녀를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종일 휘장 안에 누워 비췻빛 이불을 끌어안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병으로 신음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미 사람의 몰골이 아니다. 두 유방은 축 늘어져 부드러움이라고는 찾을 수 없다. 초점이 없어 텅텅 빈 두 눈에는 참담한 눈빛만이 남아 있다. 분홍빛 화장은 이미 퇴색하여 밀랍처럼 누렇게 떠 있다.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거무튀튀하다. 옥처럼 투명했던 가느다란 손가락은 매의 발톱처럼 앙상해졌다. 올림머리는 갈수록 짧아졌지만, 쑥대처럼 헝클어진 머리칼은 아직은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 이게 바로 한나라 이부인(李夫人)이 숨기려 했던 병태(病態)였고, 명나라 풍소청(馮小靑)이 일부러 생전에 젊은 시절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려 했던 이유였다. 아름다운 여인이 세상을 떠나면 장례식장에는 음산한 바람이 분다. 부드럽고 가느다란 허리도 이미 강항령(强項令)의 목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말솜씨가 좋았던 앵두 같은 입술은 자고새처럼 울기만 할 뿐 사랑스러운 목소리는 낼 수가 없다. 붉은 비단으로 싸인 하얀 손은 옥구슬이 맞부딪치며 나는 듣기 좋은 소리를 낼 수 없다. 흰 천으로 감싸인 양발이 어찌 금빛 연꽃처럼 걸음을 걸을 수 있겠는가? 황토 아래에 묻힌 그녀는 마치 끈이 끊어진 은색 병이 어두운 우물 아래로 떨어진 것과 같다. 눈을 뜨면 사방이 푸르스름하게 반짝이는 도깨비불일 것이며 비취색 옥에 새겨넣은 금빛 꽃은 영원히 무덤 안에 묻힐 것이다. 무덤 머리맡에는 소나무가 푸르러 옛날 아름다움을 애통해할 수밖에 없다. 무덤 안에는 음산한 바람이 불어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사람 발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희미한 영혼은 살아 돌아올 희망이 없다. 앙상한 뼈는 어둠 속에서 부식될 것이다. 비단옷은 조각조각 흩어져 나비가 될 것이고 썩어 문드러져 재가 될 것이니 다시는 투명한 옥체를 덮을 수 없게 되었다. 시들어버린 연꽃처럼 얼굴 위에는 생전의 매끄러운 피부를 찾을 수 없다. 또한 말라버린 연못처럼 눈에는 더는 피와 살이 없다. 향기롭고 보드랍던 몸에는 근육과 뼈만 앙상히 남아 있고 복숭아 살구와 같던 얼굴에는 드문드문 치아만이 남아 있다. 무수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검은 머리카락은 연기가 되고 냉습한 지하에 있다 보니 흰 눈처럼 영롱하던 피부 역시 물이 된다. 그녀가 양옥환(楊玉環)이든 조비연(趙飛燕)이든 최후의 결말은 모두가 같다. 바로 아름다운 해골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도 한창때의 아름다운 외모를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책을 덮고 풍류를 즐길 생각에 빠져들거나 미인도를 바라보며 여유를 즐기며 헛되이 정신만 산란하게 할 필요가 없다. 한평생을 미색을 따라다녀보았자 그 누가 영원히 사랑을 나눌 수 있겠는가? 아, 정말 슬프도다!
- 서낭(徐娘): 남조(南朝) 양(梁)나라 원제(元帝)의 비 서소패(徐昭佩). 노년에도 한창때의 아름다움을 간직했다 함. 한창 때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중년 부인을 지칭함.
- 소소소: 남제(南齊) 시기에 항주(杭州) 일대에서 유명했던 기녀. 천성적으로 병약하여 어린 나이에 요절함.
- 주림(株林): 시경(詩經) 국풍(國風)의 한 편.
- 하희(夏姬): 춘추(春秋)시대 정(鄭)나라의 공주. 역사서에는 그녀가 세 차례나 왕후가 되고 일곱 번 결혼하였으며 남자 아홉 명이 그녀 때문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이부인(李夫人): 한무제(漢武帝)의 총애를 받았던 여인. 춤과 노래에 능한 절세미인이었으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 풍소청(馮小靑): 명나라 때 항주(杭州)에 살던 유명한 미인. 풍생(馮生)의 첩으로 들어갔으나 본처의 핍박을 받다가 죽었다.
- 강항령(强項令): 한나라 광무제(光武帝) 때 동선(董宣)은 공주 집안의 노비를 법에 따라 체포하고 황제의 부탁에도 법을 지켜야 한다며 석방을 거절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강직함을 칭송하며 ‘강항령(强項令)’이라고 불렀다.
- 양옥환(楊玉環): 양귀비를 가리키며 서시(西施)·초선(貂蟬)·왕소군(王昭君)과 함께 중국의 사대 미녀로 손꼽힌다.
- 조비연(趙飛燕): 한(漢) 성제(成帝)의 애첩으로 중국의 미녀 중 하나로 불린다.
◈ 중국인들은 인생의 중요 연령대를 각각 별도의 호칭으로 부른다.
이를 우리는 아무런 지식도 없이 같다가 쓰고 있으니 이제부턴 말의 뜻을 바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중국인들이 나이를 말 할땐 대단히 복잡하다.
상당히 복잡한 것 같으나 이해하면 쉽게 활용이 가능 하다.
이 지식만이라도 제대로 알고 사용한다면 중국 문화와 관습에 상당한 실력을 갖추었다고인정 을 받을 것이다.
모두 한번쯤은 머리속에 넣어둘 상식이다.
챵바오(襁褓, 강보)는 돌이 채 안된 영아 를 말하고
하이티(孩提, 유아)는 두 세살짜리 어린이를
쓰천(始龀, 이를갈기시작)은 칠팔세 아동
중쟈오(總角, 머리를 빗어올려 두개의 뿔처럼 졸라맨 아이들의 머리모양)
추이티아오(垂髮: 머리를 땋아늘인 아이들의 모양)는 동자 들을 부르는 총칭이다.
이러한 호칭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즐겨 사용되고있다.
성어에 서낭반로(徐娘半老)라는 말이 있다.
서낭은 남조(南朝)시기 양원제(梁元帝)의 아내 서희(徐妃)를 가리킨다.
'남사 원제 서희전(南史元帝徐妃傳)'에 따르면 서희는 아름답기는 했지만 줄곧 원제의 총애를 받지못했다.
그러다 중년에 들어선후 그는 황제 주변의 젊은 신하 계강(季江)과 관계를 맺었다.
어느날 누가 계강 에게 나이많은 서희를 사랑하는 맛이 어떤가 하고 농담을 건너자
계강은 서낭은 비록 나이는 많지만 매우 다정다감 하다(徐娘雖老,猶尙多情)라고 대답했다.
중년의 여성에게 좋은 의미로 쓰이지만,은근히 경박한 뜻도 있기에 직접 사용하면 실례가 된다.
더우커우낸화(豆蔻年华, 두구년화, 蔻: 두구(풀) 구. 처녀시절)는 13세정도의 소녀를 가리킨다. 출처는 두목(杜牧)의시'송별'에 나오는 “사뿐사뿐 어여뿐 자태,2월초 돋아난 두구같구나(娉娉袅袅十三余,豆娉梢头二月初)이다.
이말은 13세-20세 처녀를 총괄해서 부르는 말로도 쓰인다.
다이낸(待年, 대년)은 시잡 가기를 기다리는 성숙한 처녀를 말한다. 고대시절 여자들은 15세가되면 머리를 빗어올려 비녀를 꽂은데서 유래되었는데
다이즈(待字, 대자: 약혼을 기다리다. 처녀가 과년하도록 약혼을 하지 않고 있다.)혹은 다이즈구귀이중(待字閨中)이라고도한다.
뤄관(弱冠, 약관)은 20세의 남자이다.고대에 남자는 20세만 되면 성년으로 간주해 관례(冠禮)를 했기에 생긴말이다.
20세의 여자는 타오리 낸호하(挑李年華, 묘령)라 한다.
얼리(而立, 이립)는30세를 의미하며 출처는 논어(論語 정치(政治)편이다. 자왈 '나이 삼십에 일어선다(子曰三十而立)'고 했으니 곧 혼자서도 어떤일을 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부허(不惑, 불혹)은 40세,
즈밍(知命, 지명)은 50세
얼쑨(耳順, 이순)은 60세 이다.출처는 역시'논어'정치편이다.
자왈 '나이 40이면 반듯해진다(子曰,四十而不惑)'고 했으니, 지혜가 갖추어지고 사리가 분명해진다는 뜻이며, 자왈, '나이오십이면 천명을 안다(五十而知天命)'했으니, 생명을 포함 천지만물의 운행법칙을 이해한다는 뜻이고 또한 공자 께서는 나이 60이면 무엇이나 귀에 거슬리지않는다 했으니 수행이 성숙되어 듣기 싫은 일은 거의 없다는 뜻을 가르킨다.
60세는 회갑(花甲, 화갑)이라고도 한다.
구시(古稀, 고희)는 70세를 의미한다.'술빚은 가는 곳마다 생기는 것이요,인생 칠십이면 고래희 이다(酒債尋常行處有,人生七十古來稀)',라고 노래한 두보(杜甫)의 곡강(曲江)이 원전이다.
마오데(耄耋, 모질, 耄:늙은이 모 耋: 팔십 늙은이 질)는 80~90세를
치이(期颐, 기이, 颐: 턱 이)은 100세 이상을 의미한다.출처는 각각 '한.조조 대주가(漢.曹操 對酒歌)'와 '예기 곡례상(禮記.曲禮上)'이다. 고령 노인들 천수 다 하시어 천하 모든 사물에 은혜를 베푼다.
(耄耋皆得以壽終, 恩澤廣及草木昆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