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숭(전진)
서숭(徐嵩) (? ~ 387)
전진의 인물. 자는 원고(元高)[1]. 건무장군•기주(冀州)자사 서성(徐盛)의 아들.
어려서부터 깔끔하고 총명하기로 명성을 얻었다. 부견이 황제 부생을 몰아내고 천왕으로 즉위하자, 현량으로 천거되어 낭중(郎中)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안(長安)현령으로 승진하여 수도에서 법을 어기는 자는 설령 귀족의 자제라 할지라도 철저히 조사하였고, 청탁을 받거나 사사로이 봐주는 법이 없었다. 천왕 부견은 이를 심히 기특하게 여겨 그의 숙부 서성에게 이르길, "장리(長吏)가 된 사람이라면 응당 이와 같아야 하오. 저 젊은이가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고 대범한 것을 보아하니, 단이(端貳: 상서복야의 또다른 명칭)의 재능을 지니고 있구려." 라 하였다. 이후 시평(始平)태수로 부임한 서숭은 위엄과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건원 21년(385년) 6월, 전진의 도읍 장안이 서연의 모용충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풍전등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당시 중루장군을 지내던 서숭과 둔기교위 호공(胡空)은 각기 무리 5,000여 명을 모아 보루를 쌓은 채로 지키다가, 후진의 요장이 내린 관직과 작위를 받았다.
태안 원년(385년) 8월, 요장이 부견을 살해하자 서숭과 호공은 부견을 두 보루 사이에서 왕의 예에 따라 안장하였다.
태초 원년(386년) 12월, 전사한 애평제 부비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한 고제 부등이 요장을 정벌해 선소제 부견의 원수를 갚고자 군대를 거느리고 신평(新平)에 이르렀다. 이에 서숭과 호공은 무리를 거느리고 보루에서 나와 다시 전진으로 귀순하였다. 고제 부등은 서숭을 진군장군•옹주(雍州)자사로 삼고, 선소제 부견을 천자의 예에 따라 다시 제사를 지냈다.
태초 2년(387년) 12월, 후진의 무소제 요장이 전진의 빙익태수 난독(蘭櫝)을 무찌른 후, 좌장군 요방성(姚方成)을 파견해 서숭의 보루를 공략케 하였다. 이윽고 보루를 무너뜨린 요방성이 서숭을 사로잡고 질책하니, 서숭이 얼굴에 노기를 띄우고 그를 향해 욕하며 말했다. "네가 섬기는 요장은 죄가 깊어 만번 죽어 마땅한 인물이다. 부황미가 요장을 참하려 할 때, 선제(부견)께서 말리시고 그를 너그러이 용서하신 뒤, 내외로 중용하시어 열장(列將)의 지위를 누리게 하셨고 극진한 영총(榮寵)을 내리셨다. 일찍이 개와 말조차도 길러준 은혜와 친근함을 잊지 않는 법이나, 그보다 못난 너희 대역(大逆)한 강족 무리에게 어찌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어서 죽이지 않고 뭐하느냐? 나는 빨리 선제를 만나 지하에서 요장을 심판하리라!" 요방성은 분노하여 곧바로 서숭의 몸을 세 동강 낸 뒤에 참수하였고, 그 수급에 옻칠을 하여 요강으로 사용하였다. 또, 서숭의 병사들은 모조리 구덩이에 던져져 생매장되었고, 그들의 처자식은 요방성의 병사들에게 포상으로 주어졌다.
서숭의 최후를 전해들은 고제 부등은 슬피 울부짖고 애통해하면서 그를 거기대장군, 의동삼사로 추증하였고, 시호는 '충무(忠武)'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