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양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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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文盛(서문성)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인물로 자는 도무(道茂).

서경지(徐慶之)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집안이 대대로 북위에서 장수를 지냈다. 서문성의 아버지인 서경지는 아들을 포함한 1천여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양나라에 귀순하려고 했으나 도중에 죽었고 서문성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귀순하였다. 서문성은 공적을 세워서 무제로부터 총애를 받아 대동 연간 말에는 관직이 지절, 도독영주제군사(都督寧州諸軍事), 영주 자사까지 이르렀다.

548년에 후경이 반란을 일으키자, 서문성은 1만여 명의 의용병을 모집하여 수도인 건강성을 구원하려고 하였다. 상동왕 소역은 서문성의 계략을 찬성하여 서문성을 지절, 산기상시, 좌위장군, 도독양남진사동익파북파6주제군사(都督梁南秦沙東益巴北巴六州諸軍事), 인위장군(仁威將軍), 진주 자사로 임명하고 후경을 토벌할 전략을 전수하였다. 550년, 서문성은 무창에서 후경의 장수인 임약(任約)과 대치하였다. 임약과 서문성의 싸움이 길어지자 소역은 다시 호군장군 윤열(尹悅), 평동장군 두유안(杜幼安), 파주 자사 왕순(王珣)을 서문성의 지휘를 받도록 명하였다. 서문성은 패기(貝磯)에서 임약을 공격하였고 임약이 대패하여 서양(西陽)으로 달아나자, 서문성은 다시 여주(蘆洲)까지 진군하여 임약과 대치하였다.

후경은 임약이 열세에 몰렸다는 소식을 듣고 대군을 이끌고 서양으로 진군하였다. 장수들은 후경의 수군이 굶주리고 지친 틈을 이용하여 후경을 공격하자고 제안하였지만 서문성은 장수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경이 장수들의 장수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건강성에 있는 자신의 아내 때문이었다. 후경이 서문성의 아내를 서문성에게 보내주자, 서문성은 후경에게 감사하여 후경과 싸우지 않았다. 결국 서문성의 태도에 장수들이 분노를 머금었고 두유안 등이 단독으로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여 후경의 수군을 격파하였으며 후경의 함선을 노획하여 돌아왔다. 한편 후경이 몰래 기병을 보내 샛길 따라 영주(郢州)를 습격해 함락시키자 서문성의 군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서문성은 군대가 대패하자 형주로 돌아와 성북면도독으로 임명된다. 하지만 서문성이 받은 뇌물이 매우 많아서 소역은 서문성이 저지른 죄 10가지를 열거하며 그의 관작을 삭탈시켰다. 서문성은 이 일로 인해 병권을 상실하고 소역을 원망하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이 소역의 귀에 들어가자 결국 감옥에 갇힌다. 마침 이전에 자신과 대치했던 임약도 붙잡혀서 감옥에 갇혀있었는데, 서문성은 임약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빨리 항복하지 않고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는가?”라고 말하였다. 임약이 “문 밖에서 경이 탄 말의 흔적을 보지 못했는데 나를 어떻게 항복시킬 수 있었는가?”라고 말하자 서문성은 여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문성은 옥중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