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치 요시오키(大内義興 おおうち よしお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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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요시오키(大内義興 おおうち よしおき)

오우치 요시오키(일본어: 大内義興 おおうち よしおき, 분메이 9년 음력 2월 15일(1477년 3월 29일) ~ 교로쿠 원년 음력 12월 20일(1529년 1월 29일))는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센고쿠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스오 센고쿠 다이묘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등장하기 전인 센고쿠 시대 전기의 패권을 장악한 영웅으로 평가되고 있다.

분메이(文明) 9년 (1477년) 오우치 가문 제14대 당주 오우치 마사히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기도마루(亀童丸)였다. 조쿄(長享) 2년 1월 30일(1488년 3월 13일)에 교토에서 원복(元服)을 행하고 무로마치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尚)로부터 이름 한 글자 「요시」(義)를 받아 「요시오키」(義興)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메이오(明応) 원년 (1492년) 아버지의 명으로 롯카쿠 다카요리(六角高頼) 토벌전(이른바 조쿄 엔토쿠의 난)에 참전하였다.그러나 전쟁이 한창이던 메이오 2년(1493년에 간레이(管領)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키(足利義材)를 유폐하는 메이오 정변(明応の政変)이 발생한다. 이때 요시오키는 병사를 셋쓰 국(摂津国)의 효고(兵庫)로 이끌고 올라온 채 사태 추이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정변에 관련하여 호소카와 마사모토파였던 다케다 모토노부(武田元信)의 부하에 의해 당시 교토에 머무르고 있던 요시오키의 누이동생이 유괴되는 사건(『大乗院寺社雑事記』메이오 2년 윤4월 1일조)이나 아버지 마사히로가 요시오키의 측근에게 할복을 명하는 사건(『大乗院寺社雑事記』明応2年 8월 4일조) 등이 발생하였는데, 호소카와 마사모토 등이 오우치 마사히로가 아시카가 요시키를 지원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인질을 잡아 놓고 젊은 요시오키에게 압력을 가하였고 그에 대한 대응이 스오 본국에 있던 마사히로의 노염을 산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그러나 한편으로 이때의 병력 동원이 교토에서 태어났을 요시오키와 스오 본국의 피관(被官)들과의 관계 구축에 크게 기여하게 되어, 훗날 요시오키가 가독을 잇고 난 뒤 그의 지배에 보탬이 되었다.

메이오 3년(1494년) 가을, 아버지 오우치 마사히로가 병으로 당주의 자리를 물러나 은거하면서, 요시오키가 가독을 이어받아 제15대 당주가 되었다.잠시 동안 요시오키는 은거해 있던 아버지 마사히로의 후견을 받았고, 메이오 4년(1495년) 9월 18일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요시오키는 명실상부한 오우치의 당주가 되었다.

그러나 요시오키의 가독 계승 전후로 오우치 집안 내부에 불온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였다. 우선 앞서 기나이로 병력을 동원했을 때 요시오키를 따라 출진하였으나 갑자기 출분하여 출가해 버렸던 스에 다케모리(陶武護, 스에 오키후사의 형)가 스오로 돌아오자 대신 가독을 이었던 동생 스에 오키아키(陶興明)를 메이오 4년(1495년) 2월에 살해해 버렸다. 그리고 다케모리는 "나가토 슈고다이(長門守護代)인 나이토 히로노리(内藤弘矩)가 요시오키를 몰아내고 대신 그 동생 손코(尊光)를 옹립하려 한다"고 참언하였고, 이것을 믿고 요시오키는 메이오 4년(1495년) 2월 28일 병사를 호후(防府)로 보내 나이토 히로노리와 그 아들 히로카즈(弘和)를 주살해 버렸다.

다만 훗날 나이토 부자의 원통함을 알게 된 요시오키는 참언한 다케모리를 주살하고 히로노리의 딸을 자신의 정실로 맞이하고 히로노리의 동생인 히로하루(内藤弘春)에게 나이토 씨를 잇게 하였다. 스에 씨에 대해서도 막내동생인 스에 오키후사(陶興房)에게 뒤를 잇게 하여 재흥시켰다.

하지만 다케모리가 참소한 내용 가운데 요시오키의 동생인 ・ 다이코인 손코(大護院尊光)가 새로운 오우치 당주로 옹립되기를 꾸미는 음모가 있다는 것은 메이오 8년(1499년)에 현실이 되었다. 중신 스기 다케아키라(杉武明)가 반란을 일으켰다. 요시오키는 이를 진압하고 다케아키라를 자살하게 하였다. 손코는 오토모 씨(大友氏)를 의지하여 분고(豊後)로 망명했다.

그런데 나이토 히로노리 ・ 스에 다케모리 ・ 스기 다케아키라의 주살에 대해서는 통설과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예를 들면 나이토 히로노리는 스에 다케모리와 함께 모반을 일으키고자 하여 선대 당주인 마사히로에게 살해되었다는 설(『晴興宿禰記』明応4年3月21日条)이나, 스기 다케아키라가 직전까지 요시오키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것 등으로, 이는 오우치 내부에 보다 복잡한 정치적 대립이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아버지 마사히로가 아직 살아 있었을 때 스에 히로모리(陶弘護, 다케노리 ・ 오키아키 ・ 오키후사 형제의 아버지)나 나이토 히로노리가 사망하였고, 유력 중신인 스에 씨 ・ 나이토 씨가 한꺼번에 몰락하게 된 것은 마사히로의 뒤를 이은 요시오키의 지위를 안정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오우치 씨는 오랜 기간에 걸쳐 규슈 북부에서 오토모 씨(大友氏)나 쇼니 씨(少弐氏)와의 항쟁을 지속하며 세력을 넓혔다. 아버지 마사히로 대에 영유하였던 스오, 나가토, 부젠, 지쿠젠에 더하여 아키, 이와미 슈고를 겸했으며, 그 밖에도 히젠의 일부까지도 세력하에 두었다. 오토모 마사치카(大友政親)가 오우치 마사히로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삼아 두 집안 사이에는 혼인 관계가 맺어졌고, 이어 그녀가 낳은 오토모 요시우(大友義右)가 가독을 잇게 되면서 요시오키와 요시우가 종형제로써 협력하게 되어 안정된 관계를 쌓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메이오 5년(1496년)에 요시우가 급사하고, 당시 요시우가 대립하고 있던 아버지 마사치카가 아들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져, 실권을 되찾으려는 마사치카가 기타큐슈의 오우치 영지를 침공하고자 병사를 일으켰다. 그런데 마사치카가 탄 배가 조난을 당해 하필 오우치 씨의 본거지인 나가토에 다다르고 말았고, 자신의 영지를 침공하려 했다는 사실에 요시오키는 격분하여 마사치카를 붙잡아 할복시키고 말았다.

사건의 배경에는 오우치 씨의 세력 확대와 호쿠리쿠 지방(北陸地方)에 망명 중이던 전임 쇼군 ・ 아시카가 요시키와의 제휴를 두려워한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암약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뒤 요시오키는 오토모 지카쓰나(大友親綱)의 아들로 출가하여 다이쇼인(大聖院)에 있던 슈신(宗心, 오토모 지카자네)을 오토모 씨의 후계자로 내세우려 하였지만, 마사치카의 동생으로 슈신의 사촌인 오토모 지카하루(大友親治)가 저항하여 실패한다. 또한 앞에서 서술한 대로 메이오 5년(1499년)에 반란에 실패한 요시오키의 동생 다이호인 손코가 망명지에서 오토모 지카하루의 아래로 들어가,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옹위하고 있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카(足利義高, 요시즈미)의 이름자 한 글자를 받아서 오우치 다카히로(大内高弘)로 이름하였다.

한편 지쿠젠의 탈환을 노리던 쇼니 마사스케(少弐政資) ・ 다카쓰네(高経) 부자도 오토모 마사치카(大友政親) ・ 마사하루 형제와 결탁하여 히젠 국(肥前国)에서 지쿠젠 국으로 병사를 진군시켜 오우치와 싸웠는데, 요시오키도 메이오 5년(1496년) 말에 이르러 아카마세키(赤間関)에 병사를 결집시켜서 12월 13일에 쇼니 씨의 본거지가 있는 지쿠젠을 향해 출진한다.메이오 6년(1497년) 3월 13일에 하카타(博多)의 세이후쿠지(聖福寺) 문앞에서, 15일에는 지쿠시 촌(筑紫村)과 다카토리이 성(高鳥居城)에서 싸웠으며 지쿠젠으로 쳐들어갔던 쇼니 부자를 쳐부수고 히젠으로 침공하였다. 3월 23일, 히젠(肥前)의 아사히 성(朝日城)을 공략하였다. 4월 14일 쇼니 마사스케를 고쇼 성(小城城)에서 포위하였다. 일단 야마구치로 돌아온 오우치 요시오키는 16일 스오 경내의 이치노미야(一宮) 玉祖神社, 니노미야(二宮) 이즈모 신사(出雲神社), 산노미야(三宮) 仁壁神社, 시노미야(四宮) 赤田神社, 고노미야(五宮) 아사다 신사(浅田神社)를 차례로 참례하였다. 18日、小城城は함락되고 쇼니 마사스케는 도망쳤으나 결국 자결하였다.

그러나, 쇼니 마사스케의 셋째 아들 쇼니 스케모토(少弐資元)가 분키 원년 (1501년) 거병하였고, 에이쇼 3년 (1506년)에 오토모 지카하루와 연대하여 오우치 령의 공격을 계획한다. 그러나, 메이오 8년 (1500년)에 메이오 정변으로 교토에서 쫓겨난 전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가 야마구치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우치 요시오키는 에이쇼 4년 (1507년) 아시카가 요시타네의 중개로 쇼니 스케모토와 화친해, 규슈 북부를 세력하에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