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교(독립운동가)
서상교(徐尙敎)
서상교는 일제강점기 대구상업학교 재학 중 교내의 항일 비밀결사인 태극단의 결성에 참여하여 체육국장으로 활동하였다. 태극단은 동지 간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군사 지식을 공유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에 참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내부의 밀고로 조직의 실체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인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일제강점기 대구상업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인 태극단을 조직하고 활동한 독립운동가.
서상교(徐尙敎)는 1923년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동(南山洞,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부친 서정조(徐正祖)의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자(字)는 문보(文甫)이고 호는 목민(木民)이다. 본관은 달성서씨(達城)이며, 한말(韓末)의 거유(巨儒)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의 후손이다.
어려서는 대구 지역의 부호였으나, 국망(國亡) 이후 가세가 기울었으며, 그의 종조부인 서건수(徐健洙)도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어려서 나라의 형편이 어려운 것에 대해 개탄하던 부친으로부터 중국이나 만주로 망명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으며 성장하였다고 한다. 대구 남산소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상업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친구들보다 두 살 정도 많은 나이로 늘 과묵하고 운동을 잘하며, 의지가 강하다는 평을 들었다.
1942년 4월 일제가 강제로 행한 창씨개명(創氏改名), 신사참배(神社參拜) 및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외우게 하는 것 등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던 차에 절친한 친구였던 이상호(李相虎)의 집에서 김상길(金相吉)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 태극단(太極團)을 결성하기로 뜻을 모으고, 체육국장에 선임되었다. 회의 명칭을 태극단이라고 한 것은 한말 이래 사용되어 온 태극기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조선 민족 최대의 목표인 독립을 쟁취할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T · K · D라는 약칭도 함께 사용하였다.
이후 태극단은 김정진(金正鎭) · 이준윤(李浚允) · 이원현(李元鉉) · 윤삼용(尹三龍) · 이태원(李兌遠) · 최두환(崔斗煥) 등을 20여명의 단원을 확보하였으며, 1943년 5월 9일 대구 비파산(琵琶山)에 모여 정식으로 결단식을 갖기로 하였다.
참여 인원이 적어 결단식은 6월 6일로 연기되었으나, 이후 조직 체계를 갖추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단장은 이상호가 맡았으며, 산하에 관방국(官房局) · 체육국(體育局) · 과학국(科學局) · 군사부(軍事部) · 항공부(航空部) · 등산부(登山部) 등 10여 개의 부서를 두었는데, 유도 유단자였던 그는 등산부장과 무도(武道)부장을 담당하였다.
태극단은 주로 동지 간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체력을 단련하는 한편, 군사 지식을 공유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중국이나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에 참가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이다. 또한, 중학교 1 · 2학년생과 보통학교 상급반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건아대(健兒隊)라는 별도의 조직을 두어 조직 규모를 확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5월 하순경 내부의 밀고로 조직의 실체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었으며, 5월 23일 수업 도중 학교에서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소년 형량 단기 5년, 장기 7년을 언도받고 인천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1945년 8 · 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수감 중 심장병 등으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생계를 위해 서울은행에서 정년까지 근무하였다. 이후에는 순국선열 · 애국동지사업기금 운영위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한국독립운동가족회 고문, 광복회 이사 및 사무총장 등을 지냈으며, 2018년 3월 13일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