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환-예성강도
예성강도 | |
작가 | 박성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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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연도 | 1978년 |
규격 | 300호(197x290.9cm) |
유형 | 무역 |
분류 | 유화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목차
정의
고려시대 예성강 하류에 있었던 하항 벽란도를 그린 기록화이다.
설명
작품 소재
벽란도(碧瀾渡)는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에 가까운 국제무역항으로 중국 송나라 상인을 비롯하여 일본, 남양, 서역의 상인까지 드나들었다. 또한 국제적인 교역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거나 국내로 들어오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려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내항(內港)으로서도 벽란도는 국도인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꼭 들러야 하는 나루터였다. 특히, 육로로 중국에서 오는 도로 끝에 있어 유동인구도 많았던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이를 반영하여 작품에는 ④⑤⑥ 다양한 형태의 배가 그려져 있으며, 이국적인 복장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⑦⑨ 짐을 나르거나 ⑧ 거래를 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벽란도 부근 언덕에는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관사(館舍)가 있어 중국 송나라의 사신 일행이 도착하거나 떠나기 전에는 이곳에서 묵었다. 벽란도의 원래 이름도 처음에는 예성항(禮成港)이었다가 이 벽란정에서 이름을 따 벽란도라고 바꾼 것이다.
고려의 화원(畵員) 이녕(李寧)은 사신을 따라 송나라에 들어가 휘종(徽宗)의 요청으로 <예성강도>를 그려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1]
작품 배경
예성강은 황해도 고달산(高達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를 따라 흘러 황해로 흘러들어간다. 이 일대는 산지 지형에 가까워 강의 흐름이 비교적 빠르며 바다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조수가 밀려드는 불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악조건 때문에 오히려 물이 깊어서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으며 고려 시대의 국도(國都)였던 개성과 가까이 위치하였던 관계로 벽란도가 고려 유일의 국제 항구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성강(禮成江)이라는 이름은 고려에서 중국의 송나라와 교섭할 때 이곳에서 모든 배를 띄워 예절 있게 맞아들이고 다시 배웅했던 강이라 하여 붙여졌다. 고려 시대 송나라 상인들의 왕래가 많았을 때의 사실을 노래한 「예성강곡(禮成江曲)」도 있었다고 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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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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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예성강도 | 박성환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박성환-예성강도 | 한국학중앙연구원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박성환-예성강도 | 한국학중앙연구원 | A는 B에 대여되었다 | A ekc:hasExhibitionAt B |
박성환-예성강도 | 예성강 |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 A ekc:depicts B |
박성환-예성강도 | 벽란도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벽란도 | 예성강 | A는 B에 있었다 | A ekc:formerLocation B |
예성강도 | 예성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예성강곡 | 예성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예성강도 | 이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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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 박성환이 박성환-예성강도를 그렸다. |
1991년 11월 30일-1992년 11월 29일 |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박성환-예성강도를 대여하였다. |
1998년 12월 30일-현재 |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박성환-예성강도를 소장하고 있다. |
1124년 | 이녕이 예성강도를 그렸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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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915557 | 127.0547403 |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박성환-예성강도를 소장하였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