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신
서효신(徐孝信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장
서효신(徐孝信)[1848~1915]은 1896년 1월 예안의진(禮安義陣)의 청송 소모장(召募將)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3월 청송의진(靑松義陣)이 창의(倡義)하는 과정에서 귀향하여 소모장, 우익장(右翼將)을 맡아 하였고, 5월에는 부동외방장(府東外防將)을 역임하였다.
가계
본관은 달성서씨(達城). 자는 달오(達五), 호는 현연(玄淵), 이명은 김삼성(金三星)·김장오(金長午). 1848년 12월 29일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에서 아버지 서주희(徐周熙)와 어머니 순천김씨(順天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 태종 때의 문신 달성군(達城君) 서진(徐晉)의 후예이며, 매헌(梅軒) 서봉(徐琫)의 8세손이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인 석간(石澗) 서효원(徐孝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경서(經書)와 사학(史學)에 박식하였다. 서효원과 재종(再從) 간이고, 서효격(徐孝格)과는 삼종(三從) 간이다.
활동 사항
서효신은 1896년 1월 창의한 예안의진의 청송 소모장으로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1896년 1월 안동의진(安東義陣)과 예안의진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이 청송 지역에 전해졌고, 곧이어 고종의 애통조(哀痛詔)와 주변 각 의병진에서 발하는 통문(通文)과 격문(檄文)이 날아들면서 청송 지역에도 창의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3월 8일 안동의진의 소모장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소모 활동을 벌이면서 격문을 발하여 창의하지 않는 이유를 추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귀환하였다. 그리고 3월 9일 유시연이 청송 관아의 무기고를 열고 병기를 탈취하려 하자 무기고를 굳게 지켜 탈취를 막았다.
서효신은 3월 10일 청송향교(靑松鄕校)의 향원(鄕員) 100여 명과 함께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창의를 추진하였으며, 이어서 3월 12일 청송 유림 200여 명과 함께 청송향교에서 향회(鄕會)를 개최하여 창의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날 오후 객사(客舍)에서 창의장(倡義將)으로 심성지(沈誠之)를 추대하였다. 유림들은 3월 15일 부장(副將) 조성박(趙性璞), 우익장(右翼將) 권성하(權成夏), 좌익장(左翼將) 김상길(金相吉)을 내정하고, 참모(參謀)와 서기(書記) 이하를 선발하였다.
3월 16일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창의하였고, 3월 17일 축문(祝文)과 창서사(唱誓辭)를 낭독하며 천신과 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3월 22일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中軍將),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하여 진용을 갖추었다. 이때 서효신은 소모장에 선임되어 군량을 수집하고 군사를 소모하는 등 군세(軍勢)의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4월 19일 서효신은 소모장에서 개체(改遞)된 뒤 우익장(右翼將)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5월 14일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에 참여하여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등 크게 승리하였다. 5월 25일 청송의진이 본진을 해산하고 군내 8면으로 진영을 분산하여 면군체제(面軍體制)로 전환하면서 서효신은 부동외방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15년 6월 18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