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포 서일과 청산리대첩- 김 병 기 (광복회학술원)
백포 서일과 청산리대첩- 김 병 기 (광복회학술원)
1. 들어가는 글
일제침탈기 우리의 항일독립운동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독립전쟁론, 외교활동, 실력양성론, 의열투쟁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독립군을 양성하였다가 일제가 중국, 소련, 미국 등과 전쟁을 하게 될 때 대일전쟁을 전개한다는 것이 ‘독립전쟁론’이다.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은 일제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것이며 가장 극렬한 방법이므로 또한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독립운동 방략이기도 했다. 이러한 독립운동 방략에 따라 추진된 사업이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설치하는 것이다. 국외 독립운동기지는 이주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남북만주를 비롯하여 연해주 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설립되었다. 이들 지역에 한인 교민의 경제적 토대를 중심으로 국내외의 청년들을 모아 무관학교 등을 세워 근대적 교육과 군사교육을 실시하려는 것이다. 무관학교를 통해 배출된 독립군의 기간요원들은 남북만주와 연해주 각지에서 무장투쟁의 선봉이 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당시 만주 독립운동의 근거지이며 배경이 되었던 만주지역 한인사회의 실태와 성격을 알아보고, 특별히 북간도지역에 편성되었던 무장 독립군대의 실체를 통해 대표적인 무장투쟁인 청산리대첩을 조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배후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던 백포 서일 선생의 면면을 통해 만주지역 무장투쟁의 실체를 담아 보려고 한다. 특히 금년은 백포 선생의 서거 1백주년으로 그를 추모하는 마음이 남다르다.
2. 만주 한인사회와 독립운동기지 건설
서북간도를 비롯한 만주지방은 민족의 고토로 민족문화 발전의 중요한 터전이 되었던 곳이다. 고려조 윤관은 두만강 이북을 개척하고 9성을 쌓았다. 9성 가운데 하나인 선춘령에는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 각자한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그 이래로 명나라 말까지 국경문제로 중국과 분쟁을 일으킨 일은 거의 없었다. 명나라가 망하고 대신 중원을 차지한 여진족 청은 1658년 만주를 봉금지대로 선포하여 중국인과 조선인의 이주를 엄금하는 조치를 내렸다. 만주가 청나라 조상의 발상지라는 이유와 이 지역의 경제적 자원과 토지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봉금지대는 조선의 변경 거주자들이 인삼 등을 채취하고 수렵과 벌목에 종사하던 생활무대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생계를 영위하기 위하여 금법을 무릅쓰고 도강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범월자 문제가 조선과 청국 간의 외교문제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청의 강희제는 1712년 오랄총관 목극등을 변계사정관으로 임명하여 백두산 일대를 탐사하고 양국간의 국경선에 대해 조선과 약정하게 하였다. 이들은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으로 10여 리 떨어진 압록강과 토문강의 발원지점에 정계비를 세웠는데, 임계순, 『한민족독립운동사』2, 국사편찬위원회, 1987, 574쪽. 토문강이 송화강의 한 지류임을 알지 못하고 두만강의 상류인 것으로 오인하였다. 따라서 국경은 압록강 – 토문강이 아닌 압록강 – 두만강으로 획정되었다. 청나라의 무리한 주장으로 결국 백두산 정계비가 한민족의 한으로 남게 되었다. 양태진, 『한국변경사연구』, 법경출판사, 1989, 47쪽.
그 뒤에도 변경 거주 한인들 가운데는 국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는 자가 속출하였다. 특히 1869년과 1870년 극심한 흉년이 들자 백성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게 됨으로써 이주 한인은 급증하게 되었다. 이에 청나라는 봉금정책을 폐지하고 초간국(招墾局)을 두어 실제적인 지배를 획책하였다. 서북경략사였던 어윤중은 도강 이주민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합법적인 대우를 하였다. 조선정부에서도 정계비에 나타난대로 도문강(두만강) 이북과 토문강 이남의 중간지대가 조선 영토임을 청에 정식으로 통고하고 이의가 있다면 다시 국경을 조사할 것을 제의하였다. 고승제, 『간도이민사의 사회적 분석』, 《백산학보》5, 1968, 218쪽. 조선과 중국이 수차의 회담을 가졌지만 양측의 주장이 너무 달라 근본적인 합의를 볼 수가 없었다. 이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907년 용정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대륙침략 정책의 일환으로 간도지역이 한국의 영토임을 주장하고 나왔다. 일제는 대륙침략의 필수조건이 되는 철도부설권과 채광권 획득을 위해 교환조건으로 간도지방을 완전히 청에게 양도하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에 따라 1909년 9월 4일 이른바 ‘간도협약’이 체결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로써 이주 한인에 의해 개척되어 대규모의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있던 두만강 이북의 땅을 상실하게 되었다. 19세기 중엽 본격적으로 한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이주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기아와 빈곤 등 경제적인 동기였다. 이주 한인들이 정착한 간도와 연해주 등지는 역사적으로 볼 때 고구려, 발해의 활동무대인 민족고토였다. 또한 한국과는 지리적으로 연접해 있었기 때문에 이주가 용이했다. 회령부사로 부임한 홍남주는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두만강 대안인 간도 개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두만강 대안을 ‘간도’라 명기하도록 지시하고 개간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윤정희, 『간도개척사』, 《한국학연구》3, 별책,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5쪽.
1880년대에 들어와서는 청 정부측에서도 간도 개척을 위해 한인 이주를 적극적으로 초치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1883년 조선과 길림성 당국간에 ‘조길통상장정’을 체결하고, 1885년에는 용정에 통상국을 설치하였다. 통상국을 설치한 목적은 이주 한인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려는 데 있었다. 북간도 이주 초기 단계에서는 한인들이 두만강변의 무산, 종성, 회령 등지에서 도강한 뒤 강기슭의 산골짜기를 따라 해란강 남쪽 분지와 산기슭에 한인촌을 형성하였다. 그 뒤 이주민이 급증하면서 한인들은 해란강을 건너 부루하통하와 가야허 방면으로 깊숙이 이주 정착하게 되었고 이로써 북간도 도처에 한인촌락이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조선족교육사』,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1, 2-3쪽;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중국동북지역한국독립운동사』, 집문당, 1997, 47쪽에서 재인용.
한인들은 북간도에 정착하면서 먼저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북간도 한인들이 벼농사를 시작한 것은 1900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용정시 개산툰진 천평 일대와 해란강변의 서전벌 일대가 한인들이 최초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 연변인민출판사, 1984, 54쪽.
1905년 을사5조약으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한인들의 간도 이주는 경제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도 증가하였다. 국권회복을 도모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망명, 곧 항일운동자의 이주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간도 이주 한인들의 출신지를 살펴보면 함경도와 평안도의 변경지대 출신자들이 대다수로 특히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출신이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임계순, 『한민족독립운동사』2, 589쪽.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에 의하면 당시 만주 이주민의 실태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한인 이주민은 대부분이 대개 겨울철에 만주로 이주한다. 그것은 농작물이 성장할 시기에는 죽을 먹더라도 국내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늦은 가을에 그들은 자신의 몫으로 얼마 안 되는 수확물과 모든 가재도구를 팔아 여비로 삼아 이주의 행렬에 끼어든다. 때문에 만주에 도착할 때 한인의 80~90%는 빈손이 되어 먼저 이주하여 온 동포들의 집단에서 기생적으로 생활하게 되거나 또는 생활의 대가로 이듬해부터 중국인 지주가 명하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계약 하에 그들이 주는 음식과 거처할 곳을 우선 얻게 된다. 그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첫해에 거의 노예 생활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현규환, 『한국유이민사』상, p.223.
‘독립전쟁론’에 따라 국외 독립운동기지건설 계획이 전개되었다. 기본전략은 먼저 국민을 애국주의와 신지식으로 교육, 계몽하고 청소년을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간부로 양성하여 민족내부의 실력을 준비하고 양성하는 것이다. 또한, 국외에서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가 일본제국주의가 더욱 팽창하여 중국, 러시아, 미국 등과 장차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윤병석, 『독립군사』, 지식산업사, 1991, 31쪽. 이들과 함께 대일전쟁(對日戰爭)을 감행하여 우리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방략이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이 전개되는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일제가 패망하는 그 날까지 민족의 군대인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장부대를 편성하는 사업이 추진되었다.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독립운동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8, 20-21쪽.
먼저 일찍부터 교민들이 정작한 북간도지역에서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되었다. 1905년 을사5조약의 체결로 국망을 예견한 이상설, 이동녕, 이회영, 정순만, 여준 등의 민족운동가들은 1906년 8월부터 북간도의 중심지였던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이 학교 설립을 주도했던 이상설이 헤이그특사로 파견되면서 재정난과 일제의 훼방으로 이듬해 문을 닫고 말았다. 반면 많은 항일민족운동가들이 북간도로 망명하면서 명동촌의 명동학교를 비롯한 수많은 한인학교가 북간도 각지에 설립되어 민족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항일독립운동을 선도하게 되었다. 이외에 이동휘는 선교활동을 통해 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 대종교 계열의 민족지도자들도 대거 북간도에 망명하여 무장항일전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전력하였다.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을 비롯하여 서일, 계화, 박찬익, 백순, 현천묵 등은 북간도 연길, 화룡, 왕청 일대로 망명하여 곳곳에 한인학교를 세우고 청년자제의 민족주의교육에 진력하였다. 《독립신문》1920년 1월 1일자.
다음으로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착수된 곳이 북만주의 밀산부이다. 밀산부의 독립운동기지는 유럽에서 헤이그특사 임무를 마친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 이상설과 연해주 신한촌의 한민회장 김학만을 비롯하여 정순만, 이승희 등이 중심이 되어 1909년 여름부터 추진되었다. 이들은 중국과 러시아 접경지대에 위치한 흥개호 북쪽의 중국령 밀산부 봉밀산 일대에 한인들을 집단으로 이주시켜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고 한인 자제 교육을 위한 한민학교를 건설하면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해 나갔다. 북간도 한인사회에서는 이와 같이 1906년 용정촌을 중심으로 서전서숙의 설립과 더불어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추진되었다. 1907년 일제의 통감부 간도파출소가 용정에 들어와서 철저한 탄압과 방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기지의 터전을 굳혀 갔던 것을 볼 수 있다.
3. 북간도 독립군의 편성과 항전
국내외에서 일어나 전 민족이 동참한 3.1운동은 한국독립운동의 거대한 분수령이었다. 특히 국외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을 계기로 일대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서둘러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독립군을 모집하고 독립군단을 편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국내외의 민족운동가들은 3.1운동과 같은 시위운동으로는 인적 희생만 초래할 뿐 일제로부터 독립쟁취에는 별다른 효과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무장투쟁만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임을 절감하였던 것이다. 민족운동가들은 그동안 서북간도나 연해주 일대에서 여러 형태로 양성해 온 독립군을 전투군단으로빠른 시일 내에 편성하여 일제에 맞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최상의 방편임을 확신하였다.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중국동북지역한국독립운동사』, 371-380쪽 참조.
그 동안 한인사회의 자치와 중추기관으로 활동을 하던 북간도의 간민회와 서간도의 부민단이 3.1운동을 계기로 각각 대한국민회와 한족회로 확대 개편되고 독립군 편성과 훈련을 활발하게 추진하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북간도, 연해주 일대에서는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무장 항일투쟁을 표방하며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고 있었다. 우선 북간도에서 가장 강하였던 서일, 김좌진이 지도하는 대한군정서, 안무가 거느리던 대한국민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이 통솔하던 군무도독부 등을 들 수 있다.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중국동북지역한국독립운동사』, 94쪽. 그 외에도 이범윤을 중심으로 한 항일의병들이 주축이 된 대한의군부, 이범윤을 단장으로 추대한 대한광복단, 방우룡의 의민단, 김규면이 회장인 대한신민단, 황병길을 중심으로 한 훈춘한민회 등이 중요한 독립군단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대한군정서는 국권피탈 직후에 조직된 대종교 계통의 중광단이 발전한 것이다. 북간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서일 등 대종교 지도자들은 국망(國亡)을 전후하여 두만강을 건너 항일의병을 규합하고 1911년 3월 왕청현에서 독립운동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5, 187쪽.
중광단의 핵심인물로는 단장인 서일을 비롯하여 현천묵, 백순, 박찬익, 계화, 김병덕, 서상용 등이다. 함경북도 출신이 다수였으며 근대 교육을 받고 대종교 신도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광단은 무장항일 노선을 추구하였지만 무기를 확보하지 못해 실제적인 군사활동은 전개할 수 없었다. 대신 일차적으로 대종교 포교를 통해 한인동포들에 대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1914년 5월 13일 청파호에 대종교의 총본부인 총본사를설치할 수 있었다. 아울러 각처에 시교당을 설치하고 포교에 힘써 수천 명의 신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중광단이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이는 한편 숙원과제인 무장투쟁을 벌이기 위하여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광단은 서북간도를 비롯한 만주일대의 대종교 신도와 국내에서 북상한 의병 및 공교회원 등을 규합하여 정의단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그 뒤 1919년 8월에는 군정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왕청현 춘명향 서대파 지역에 본영을 설치하였다. 본영의 아래에는 북간도 각지에 5개의 분단과 70여 개의 지단을 설치하여 군자금과 군량미를 모집하고 무기구입에 주력하였다. 군정회는 10월 군정부로 다시 명칭을 바꾸고 일제와의 혈전을 벌이는 한민족의 독립군사령부임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의 권고에 따라 대한군정서로 개칭하여 임시정부 산하의 중요 전투군단이 되었다. 대한군정서는 서간도에서 편성된 서로군정서와 구분하기 위해 북로군정서로도 불렸다. 대한군정서에서는 김좌진을 군사령관으로 초빙하고 사관 양성을 위한 무관학교인 사관연성소를 설치하면서 북간도의 대표적인 무장단체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대한군정서는 중광단 시기부터 근거지로 삼았던 왕청현 춘명향 덕원리에 총본부격인 총재부를 두었다. 춘명향 서대파 십리평에는 군사령부를 두고 군사 훈련에 전력을 기울였다. 총재 서일과 재무부장 계화는 계속 병력 증강에 힘써 1920년 봄에도 백초구 지역 등에서 약 300명의 장정을 모집하였다. 또한 이성규를 국내로 파견하여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인 김규식, 홍충희, 김찬수, 박형식을 모셔오도록 하고, 무송현에서 무관학교 출신 김혁과 유우석이 합류하게 되니 대한군정서의 전투력은 크게 진작되었다. 청산리대첩 무렵의 간부진을 보면 최고 통솔자인 총재에 서일, 부총재 현천묵, 서무부장 임도준, 재무부장 계화, 참모부장 이장녕, 사령관 겸 사관연성소장 김좌진, 사관연성소 교수부장 나중소, 교관 이범석 등이 있었다. 사관연성소는 1920년 3월 왕청현 십리평에서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대한군정서의 당면과제 가운데 하나인 정예군사를 양성하는 목표로 설립된 사관연성소의 생도들은 대체로 대종교 청년 신도와 덕원리 명동학교에서 옮겨온 학생들이었다. 개교 당시의 생도수는 6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그 해 9월 제1회 졸업생으로 289명을 배출할 수 있었다. 대한군정서의 사령관인 김좌진이 사관연성소의 소장을 겸임하고 그 아래 부관 박영희가 학도단장을 겸하였다. 교관으로는 이장녕, 이범석, 김규식, 김홍국, 최상운 등이 담당하여 정예군사를 양성하였다. 교과목은 군사학과 총검술을 비롯하여 실제 전투훈련도 실시하였다. 중광단 이후의 숙원과제였던 무장투쟁을 위해 무기도 구입하였다. 총재 서일과 재무부장 계화가 직접 인솔한 무장경비대가 무기운반대원 200명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무기를 구입해 오는데 성공함으로써 1920년 6월 마침내 사관생도들까지 무기를 휴대할 수 있었다. 청산리대첩 직전인 1920년 9월 9일 사관연성소의 제1회 졸업식을 성대히 거행하고 289명의 사관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백두산록을 향한 근거지 이동을 떠나기 직전 서둘러 졸업식을 거행했던 것이다.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중국동북지역한국독립운동사』, 99쪽.
9월 12일 부대를 재편하여 졸업생으로 별도의 ‘교성대(敎成隊)’를 편성하였다. 교성대장은 이범석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이범석이 인솔한 선발부대를 시작으로 청산리대첩의 격전지가 된 화룡현으로 이동하게 된다. 대한군정서의 이러한 성장 발전은 총재 서일, 재무부장 계화, 사령관 김좌진 등 간부진의 국권회복 일념과 불타는 각고의 노력의 소산이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5, 366쪽.
청산리대첩 직전인 1920년 8월 현재 대한군정서의 무장 전력은 독립군 약 1,200명, 소총 1,200정, 탄약 24만 발, 권총 150정, 수류탄 780발, 기관총 7문의 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국민회
대한국민회는 북간도 전역에 걸쳐 가장 정비된 지방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대한국민군을 편성하고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3.1운동 이후 결성된 ‘조선독립기성회’를 중심으로 모든 독립운동을 조직화하는 한편 ‘조선국민보’를 간행하였다. 이 회에 참가한 중요 인사들은 3.1운동 이전 ‘간민회’를 통하여 북간도 한인사회의 자치와 민족교육, 그리고 조국 독립운동에 참가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국민회는 본부를 연길현 춘양향 하마탕에 두고 5개 지방회와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하였다. 회장에는 구춘선을 비롯하여 마진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국민회군은 안무가 인솔하는 강력한 독립군 부대로 편성되었다. 1920년 8월 현재 병력 약 450명, 소총 400정, 화총 160정, 탄약 7,000발, 수류탄 120개 등의 무력을 보유하였다. 대한국민회군은 일제와 항전시 주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과 제휴하면서 연합항전을 전개하였다.
대한군무도독부
군무도독부는 최진동이 거느린 독립군단으로 본부는 왕청현 춘화향 봉오동에 설치하였다. 1920년 3월부터 6월 사이 활발하게 전개된 국내 진입작전은 거의 군무도독부 소속의 독립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때로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및 안무의 대한국민군과의 연합작전으로 수행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1920년 8월 현재 대한군무도독부의 전력은 병력 600명, 소총 400정, 권총 50정, 수류탄 20개와 기관총 2문을 보유하였다.
대한북로독군부
대한북로독군부는 1920년 5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대한국민회군, 그리고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부대로 결성한 군단의 명칭이다. 1920년 6월의 봉오동승첩을 이끈 주역이 바로 이 군단이었다. 1907~8년 함경도 북청, 삼수, 갑산 일대에서 명성을 날리던 의병장 홍범도는 국권이 피탈되기 직전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국외의병에 합류했다. 1910년 중반 북만주 밀산부로 들어가 항일전을 준비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150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북간도로 들어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여름부터 대한국민회군과 연합하여 국내 진공작전 등 항일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행정과 재정은 대한국민회가 담당하고 군무의 경우는 대한독립군을 홍범도가, 대한국민회군을 안무가 각각 분담하여 통솔하기로 약정하였다. 직접 대일항전을 전개할 때는 홍범도가 ‘북로정일제일군 사령부장’의 직함으로 전군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북로정일제일군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군사통일을 추진하고 ‘대한북로독군부’로 명칭을 바꾸었다. 대한북로독군부의 주요 간부는 부장 최진동, 부관 안무, 북로정일제일군사령부 사령부장 홍범도, 부관 주건, 참모에 이병채와 오주혁 등이 선임되었다.
독립전쟁 제1회전, 봉오동 승첩
봉오동승첩은 청산리대첩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다. 봉오동 승첩의 발단은 삼둔자전투에서 시작되었다. 1920년 6월 4일 대한북로독군부 예하 독립군 소대는 함경북도 종성군 가양동에 진입, 일본군 종성 순찰소대를 습격하였다. 그날 저녁 일본군은 보복을 목적으로 신미(新美) 중위가 이끄는 남양수비대 1개 소대병력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삼둔자에 이르러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한 일본군은 이 지역의 한인 교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때 독립군들은 삼둔자 서남방에 잠입하였다가 일본군 추격대를 섬멸하였는데 이를 삼둔자전투라 하여 봉오동승첩의 발단이 된 것이다. 나남에 사령부를 두고 두만강을 수비하던 일본군 제19사단은 삼둔자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이른바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였다. 월강추격대의 편성은 보병 제73연대 제10중대 70명, 동연대 기관총 소대 27명, 보병 제 75연대 제2중대 123명, 헌병대 11명, 경찰대 11명으로 이루어졌다. 월강추격대는 안천(安川)소좌의 인솔 아래 6월 6일 온성군 하탄동에 집결하여 오후 9시부터 강을 건넜다. 7일 새벽 3시 30분 이들은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을 향했다.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포위망 속으로 완전히 들어왔을 때 사령관 홍범도 장군은 일제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을 발사하였다. 삼면 고지에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은 이와 동시에 일본군을 향해 집중사격을 개시했다. 불시에 기습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기관총부대를 전진 배치하여 필사적으로 응전하였으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독립군의 맹렬한 공격에 일본군은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일본군의 전투 보고서에 따르면 이날 오후 4시부터는 천둥이 진동하고 엄지손가락만한 우박이 폭풍과 함께 밀어닥쳐 옷이 찟어지고 비에 젖어 추위가 살을 깎는 느낌이라 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사살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의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비해 독립군 측의 피해는 경미해 전사 4명, 중상 2명이라 발표하였다. 일본군의 전투보고서는 봉오동에서의 참패를 철저하게 은폐하였으나 중국 신문이나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대한국민회 등에서는 승첩 전과를 속보로 알리고 군량과 군수물자의 조달을 요청하고 있던 것을 볼 수 있다. 독립군 측에서는 봉오동승첩을 10년 이래의 숙원인 ‘독립전쟁의 제1회전’으로 간주하여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반면 일제는 독립군을 근본적으로 ‘토벌’하기 위해 이른바 ‘간도지방 불령선인 소토계획’을 세우게 된다.
혼춘사건과 독립군의 장정
일제는 1919년 3.1운동 이후 국경선인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을 중심으로 러시아 연해주와 남북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단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자 이를 저지하고 ‘토멸’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였다. 날로 증강되어 가는 독립군의 병력을 현지의 영사관 경찰이나 소속부대의 일시적인 도강작전으로는 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일제는 ‘제3차 봉천회담’이 있은 1920년 7월 중 이미 이른바 ‘간도불령선인초토계획’을 작성하고 나남에 있는 제19사단 병력은 물론 러시아에 출병했던 병력까지 동원하여 만주 방면을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침공계획의 도회선이 된 것은 봉오동에서의 일본군 참패였다. 일제는 간도침략에 따른 국제적인 비난과 불법성을 은폐할 적당한 구실을 찾던 중 10월 초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해 냄으로써 이를 간도침략의 빌미로 삼았다. 일본군은 만주지역에서 악명을 떨치던 장강호(長江好)라는 중국 마적두목을 매수하여 무기와 자금을 대여한 뒤 혼춘성의 일본영사관을 습격시킨 것이다. 혼춘사건이 장강호 마적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즉 혼춘을 습격한 마적은 靠山의 부하 戰東((일명 王勝東)과 萬順(王四海) 등의 마적단이라 보고 있다. 각자의 세력범위가 엄격하게 지켜지는 마적단의 관행으로 볼 때, 남만지역의 장강호 마적이 혼춘까지 들어와 활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하였다. (황민호, 「청산리전투에 관한 연구 성과와 과제」, 『한국민족운동사연구』105, 2020. 87쪽)
1920년 10월 2일 장강호의 습격으로 혼춘성의 중국인 70여 명과 한인 7명이 살해당하는 참화를 입었고, 미리 피신한 일본영사관 분관이 불탔다. 또한 이 와중에서 일본인도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강덕상, 『현대사자료』28, 146-148 참조.
이러한 혼춘사건을 구실로 일제는 대기상태에 있던 ‘토벌대’ 병력을 사건 당일부터 만주지역에 투입하였다. 중국 당국과는 사전 교섭이나 연락도 없이 신속하게 만주를 침략한 것이다. 이때 북간도일대에 집중적으로 투입된 일본군 병력은 대체로 18,000명에서 25,000명에 달하는 대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중국동북지역한국독립운동사』, 137쪽. 이들은 기관총과 대포 등 최신 정예무기와 장비를 갖추고 비행기까지 동원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작전 목적은 독립군의 완전 제거에 있었다. 그러나 간도를 침범한 일본군은 독립군 ‘초멸’에는 실패하고 독립군의 활동기반이 되었던 이주 한인사회에 대한 야만적인 학살 행위를 일삼았다. ‘경신참변(庚申慘變)’이 그것이다.
한편 북간도 각지에 근거지를 둔 독립군단은 중국측의 우호적인 협조로 새로운 근거지를 찾기 위한 장정을 계획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장정에 오른 독립군 부대는 홍범도가 인솔하는 대한독립군이었다. 대한독립군은 8월 하순 본영을 떠나 백두산을 향하여 서남방으로 이동, 9월 20일 경 안도현과 접경인 화룡현 이도구 어랑촌 부근에 도착하였다. 대한독립군에 이어 안무의 대한국민군도 근거지를 떠나 안도현 방면으로 향하여 9월 말경 역시 이도구 지방에 도착하였다.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는 군사통일과 새로운 기지건설 등의 문제로 홍범도, 안무 등과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독자적인 행보를 하게 된다. 그들은 동북지역을 향해 초모정자를 거쳐 9월 말경 나자구에 도착하였다. 또한 대한의군부, 대한신민단, 대한광복단, 의민단 등 여러 독립군단도 9월 경 안도현 방면이나 나자구로 각각 이동하였다. 김좌진이 인솔하는 대한군정서군은 가장 늦게 장정 길에 올랐다. 1920년 6월 무기 운반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되었던 무기운반대가 8월 말경 기다리던 무기와 탄약을 가지고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리고 막대한 군자금과 심혈을 기울여 배출한 사관연성소의 1회 졸업생 298명의 졸업식을 9월 9일 대대적으로 거행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장정이 늦어진 대한군정서군은 졸업생도를 중심으로 여행대(旅行隊)와 150명 가량의 사관으로 사령부 경비대와 본대를 편성하고 9월 17일과 18일 십리평의 본영을 떠나 서남쪽의 황룡현 삼도구 청산리로 진군하였다. 강덕상, 『현대사자료』27, 239쪽. 가족들을 동반한 대소 1,800명의 인원과 180여 대의 마차로 야음과 산길을 이용하여 450여 리를 강행군한 대한군정서군은 한달 만인 10월 12일 경 삼도구에 도착하였다. 대한군정서가 청산리 일대로 근거지를 정했던 것은 이 일대가 청일학교․ 의합천일학교 등이 있는 대종교 중심의 마을이었기 때문이었으며 백두산 수림이 펼쳐지는 안도현과 인접하여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춘선, 「발로 쓴 청산리전쟁의 역사적 진실」, 『역사비평』52, 2000, 267쪽)
김좌진 사령관이 인솔한 대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이 인솔한 대한독립군․ 대한국민군의 연합부대는 청산리대첩의 격전지가 되는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 밀림지대에 집결하였다. 북간도 각지의 독립군단이 백두산록에 자리잡은 안도현과의 접경지대인 이도구와 삼도구 방면의 험준한 밀림지대로 집결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1) 국경지대에 근접하여 국내진공작전을 펼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 2) 안도현의 백두산록 일대는 험준한 지세에다 산림이 울창하여 일본군과 대전하기에 유리한 지형을 갖추었다는 것, 3) 백두산록 일대가 중국의 봉천성과 길림성의 접경지대이므로 중국군의 간섭을 비교적 덜 받는다는 이유에서 이다. 일제의 강박으로 길림성군이 공격해 올 경우 봉천성으로 이동하고, 봉천성군이 공격하면 길림성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적지이기 때문이다. 당시 청산리대첩에 참가한 김좌진의 대한군정서군과 홍범도 직속의 대한독립군 등 독립군연합부대의 병력은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대한군정서 600명, 대한독립군 300명, 대한국민회군 250명, 대한의군부 150명, 혼춘한민회 200명, 대한광복단 200명, 의민단 100명, 대한신민단 200명으로 추정하여 약 2,000 명에 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윤병석, 『독립군사』, 179쪽.
반면 일본군은 나남에 주둔했던 제19사단을 주력으로 하여 3개의 ‘토벌지대’를 편성하였다.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기림지대(磯林支隊), 목림지대(木林支隊), 동지대(東支隊)로 명명한 3개 지대의 병력은 모두 12,000명으로 기림지대 4,000명, 목림지대 3,000명, 동지대 5,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동지대가 병력은 물론 화력에 있어서도 기병과 포병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가장 막강하였다.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과 직접 맞선 일본군 주력부대가 바로 동지대 병력이었다. 일본군의 간도침입 동원 병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독립군 토벌에 동원된 병력은 일본군 제19사단 전부를 비롯하여 제20사단 일부, 제11사단․ 제13사단․ 제14사단의 일부 등 5개 사단에서 차출된 대규모 인원으로 그 실병력은 25,000명에 달했다. 여기에 관동군까지 지원 병력으로 활용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4, 1988, 111쪽.
4. 청산리대첩의 전개와 통합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대일전쟁의 승리를 기록한 청산리대첩은 1920년 10월 새로운 항전기지를 찾아 장정(長征)중이던 김좌진, 홍범도, 안무 등이 인솔하는 연합독립군이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 일대의 백두산록에서 간도를 침입한 일제의 ‘토벌군’을 상대로 거둔 대승첩을 말한다. 연합독립군은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7일간에 걸쳐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천수평, 어랑촌, 완루구, 고동하 등지에서 대소 10여 회의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하였던 것이다.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중국동북지역한국독립운동사』, 132쪽.
백운평전투
청산리대첩은 좁은 개념으로 보면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이 지휘한 대한군정서군이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 계곡에서 일본군 동지대 소속의 산전연대(山田聯隊)를 크게 격파한 전투만으로 한정시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청산리대첩은 대한군정서군은 물론 이도구 어랑촌 부근의 삼림지대에 집결한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연합부대가 10월 21일부터 7일간 벌인 10여 차례의 대소전투를 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청산리일대를 침범한 동지대의 산본연대는 부대를 나누어 김좌진의 대한군정서군을 사방에서 포위한 뒤 ‘토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한편 동정언(東正彦) 소장이 직접 인솔하는 동지대의 주력부대는 홍범도의 연합부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천보산 방면에서 남하하여 독립군을 앞뒤에서 포위하려 하였다. 산본연대의 주력부대가 10월 20일 삼도구로부터 청산리 골짜기로 침입해 오기 시작하였다. 김좌진 사령관은 피전책을 버리고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부대를 2개 제대(梯隊)로 나누었다. 평소에 훈련이 적은 보병 일부와 비전투원으로 제1제대를 편성한 뒤 사령관 김좌진의 지휘하에 후방에 있게 하였다. 그리고 사관연성소 졸업생으로 구성된 연성대를 중심으로 박격포와 기관총을 포함하는 정예병으로 제2제대를 편성한 뒤 연성대장 이범석의 지휘하에 최전선을 맡게 하였다. 병력을 배치한 백운평 골짜기는 청산리 계곡에서도 폭이 가장 좁고 양쪽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으며 그 골짜기의 중앙에는 공지가 되어 단 하나의 오솔길이 이 공지를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독립군이 매복하여 적을 기습하기에는 매우 유리한 지형이었다. 산전연대의 전위부대인 안천(安川) 소좌가 인솔하는 1개 중대가 독립군의 매복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10월 21일 아침 8시 경 백운평을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오전 9시 경 백운평 골짜기를 일본군이 점령한 듯했다. 독립군의 매복지점과는 불과 10여 보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접근했을 때 김좌진의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600명에 달하는 독립군은 일본군이 있는 공지를 향하여 일시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30여 분 만에 상황은 끝이 났다. 일본군 전위부대 200여 명이 전멸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전위부대를 뒤따르던 산본연대의 주력부대가 기관총과 대포 중무기를 앞세우고 백운평 골짜기로 들어왔으나 절벽 위에서 공격하는 독립군의 화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산본연대는 끝내 다수의 시체를 남겨둔 채 퇴각하고 말았다.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 2~300명을 사살하는 커다란 전과를 세웠다. 대한군정서군은 퇴각하는 산전연대를 추격하지 않고 이도구 방면으로 즉시 이동하여 밤을 새워 갑산촌으로 행군하였다. 산전연대의 기병부대에게 퇴로를 차단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강덕상, 『현대사자료』28, 291쪽.
완루구전투
완루구전투는 청산리대첩 가운데 백운평전투에 이어 10월 22일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연합부대가 이도구 완루구에서 동지대의 주력부대를 맞아 승리한 전투다. 김좌진의 대한군정서군이 백운평전투 직후 갑산촌으로 이동하는 시기에 동지대의 주력은 2개로 나누어 홍범도부대를 초멸하기 위하여 남완루구와 북완루구의 두 길을 따라 포위망을 좁혀 왔다. 홍범도는 예정된 저지선에서 그들을 맞아 전투를 벌이는 한편, 예비대로 하여금 중간 사잇길로 돌아서 공격해 오는 동지대 일대의 측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독립신문》1920년 12월 25일자. 북완루구로 진격하던 동지대의 일대는 이러한 전략을 감지 못하고 홍범도부대의 예비대가 빠져나간 후 그 중간 사잇길에 들어간 동지대의 다른 일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자기 부대를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완루구 중앙 고지에 들어선 동지대의 일대는 한쪽에서는 독립군으로부터, 다른 한쪽에서는 동지대의 다른 일대로부너 집중공격을 받아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임시정부 군무부의 발표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 약 400명을 사살하였다고 하였다.
천수평전투
백운평전투를 치른 후 밤새 행군을 재촉하여 대한군정서군이 이도구 봉밀구 갑산촌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10월 22일) 새벽 2시 30분 경이었다. 이때 독립군들은 갑산촌 주민들로부터 인근의 천수평 일대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주둔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대한군정서군은 연성대를 앞세우고 다시 강행군을 계속하여 1시간 뒤 천수평에 도착했다. 일본군 기병중대 120명은 독립군이 접근해 온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대한군정서군은 이들을 완전히 포위한 채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일본군은 전의를 상실한 채 허둥대었다. 결국 이 전투에서 일본군 기병중대는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한 전원이 몰살하였다. 반면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2명 부상 17명의 경미한 것이었다.
어랑촌전투
[[청산리대첩]₩ 가운데 피아간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격전을 벌였던 전투가 어랑촌전투였다. 어랑촌은 국권이 피탈된 후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사(漁郞社)의 주민들이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이다. 10월 22일 천수평전투에서 탈출한 4명의 일본군은 어랑촌 부근에 주둔해 있던 동지대 본대에 참패 사실을 보고했다. 동지대에서는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가납(加納) 기병연대를 필두로 대부대를 출동시켰다. 한편 천수평전투를 치른 대한군정서군은 야계골로 이동하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뒤 출동한 일본군 대부대와 맞서게 되었다. 이날 어랑촌전투에는 독립군과 일본군 양쪽이 모든 전력을 투입하였다. 독립군측은 백운평전투와 천수평전투에서 연승을 거둔 대한군정서군 600명과 완루군전투의 승전 뒤 이 지역으로 이동해 온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연합부대 1,500여 명이 총동원되었다. 이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지대 소속의 보병, 기병, 포병 등 주력병력 5,000여 명이 참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중국동북지역한국독립운동사』, 159쪽. 일본군이 독립군에 비해 병력과 화력 모든 면에서 월등한 우세를 보이고 있는 판세였다. 그러나 독립군은 유리한 지형과 치밀한 전술을 이용해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독립군측의 작전은 먼저 대한군정서군이 어랑촌 후방의 고지를 장악하여 일본군의 진출로를 차단하고 다음으로 홍범도의 독립군연합부대가 같은 고지의 최고봉에 포진하여 대한군정서군을 지원하기 위한 전투를 벌인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월등하게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믿고 무리한 공격을 감행해 왔다. 독립군측은 항전의식이 투철한데다가 유리한 지형에 포진하고 있어 일본군을 조망하는 가운데 제압할 수 있었다. 20여 분 동안의 한 차례 공격에서 일본군 300여 명이 사살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반격을 그치지 않았다. 기병중대가 독립군의 측면공격을 시도하고 포병과 보병의 격렬한 공격이 계속되었다. 오전 9시부터 재개된 일본군의 공세는 해가 질 때까지 파상적으로 반복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군의 피해는 늘어갔다. 이 전투에 참전하였던 이범석은 자서전 『우둥불』에서 일본군 전사자와 부상자는 가납(加納) 기병연대장을 포함하여 1,000명으로 추산하였고, 독립군측도 10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고 회상하였다. 이범석, 『우둥불』, 삼육출판사, 1986, 52쪽.
이날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일본군으로부터 날아오는 야포의 공격으로 김좌진 사령관의 전투모가 포탄의 폭풍으로 날아갔으며, 이범석 대장의 군도가 파편에 맞아 두 동강이 날 정도였다는 것이다. 기관총중대장 최인걸은 적의 야포의 공격이 점차 심해지고 독립군이 철수하기로 되었는데, 본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기관총좌에 붙들어 매고 끝까지 일본군과 항전하다가 끝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더욱이 인근 부락에 살고 있는 한인 교포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고지로 올라와 돌과 수류탄으로 독립군을 도왔고, 부녀자들은 총알이 날아오는 현장까지 주먹밥을 이고와 병사들의 입에 넣어주는 감격스러운 장면도 있었다.
이밖에도 청산리대첩은 10월 23일 맹개골전투와 만록구전투, 10월 24일의 서구전투, 10월 24~25일의 천보산전투, 10월 25~26일의 고동하전투로 이어진다. 이들 전투는 자료에 따라 규모와 전적이 차이가 있으나 하나같이 혈전이었고 또한 독립군측이 승전한 전투였다.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은 전적으로 독립군들의 투철한 항전의식에서 비롯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한인 부락민의 희생적인 지원이었다. 음식을 마련하여 총탄의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군들에게 전달해준 것은 연약한 부녀자들이었다. 또한 한인 부락민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본군의 배치상황과 병력이동 등의 정확한 정보를 독립군에게 제공하고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군에게 허위정보를 제공하여 적을 교란시켰다. 때문에 독립군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고, 그들을 선제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군용전선을 찾아내 절단하여 일본군의 통신연락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청산리대첩은 민족적 역량을 합하여 일제의 침략에 대항한 승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5. 대한독립군단 결성과 백포 서일
대한군정서군은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후 지체하지 않고 밀산을 향하여 북정을 개시하였다. 같은 시기에 안무가 인솔하던 대한국민회군과 대한의군부, 대한광복단 등도 밀산으로 북정하였다. 홍범도가 인솔한 대한독립군과 연합부대 600명은 고동하전투를 마무리한 후 안도현에서 지청천이 거느리는 서로군정서군 400명과 합류하여 하나의 부대를 편성한 후 총사령관 홍범도, 부사령관 지청천을 선임하고 애국동지원호회, 『한국독립운동사』, 320쪽.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밀산을 향하여 북정을 개시하였다. 한편 김좌진의 대한군정서와 홍범도의 독립군연합부대가 백두산록을 향할 때 북쪽의 나자구로 향한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은 나자구에서 이범윤을 총재로 추대하고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하는 ‘대한총군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일본군과 나자구에서 일제와 항전 준비를 하다가 다른 독립군이 밀산 방면으로 북정을 하자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모든 독립군 부대가 밀산으로 북정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만주 각지, 특히 북간도의 중요 독립군부대는 청산리대첩 이후 중소국경 부근의 밀산으로 모이게 된 것이다. 독립군의 북정 집결지가 된 밀산은 1910년 전후부터 민족운동자들의 국외 독립운동기지의 하나로 경영하기 시작한 곳이었지만 많은 독립군을 장기간 수용할 수 없는 곳이었다. 따라서 독립군들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월경하기로 결정했다. 연해주는 간도지방 못지않게 1910년 전후부터 국외 항일운동의 중추기지로 터전을 닦아 오던 곳이었고, 20만 명이 넘는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있던 곳이었다. 더욱이 당시는 볼셰비키들이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후원하겠다고 선전하던 때였다. 밀산에 독립군부대들이 속속 도착할 무렵 서일이 총재로 있는 대한군정서에서는 독립군단의 대동단결을 호소하는 격고문을 발표하였다. 《독립신문》1921년 2월 25일자. 대한군정서의 격고문은 밀산에 집결한 모든 독립군단들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격고문 취지에 찬동하는 독립군단의 대표들은 회의를 열어 장기항전을 위해 노령 연해주로 월경할 것을 결정하고 하나의 독립군단으로 진군하기 위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이에 합류한 중요 군단을 보면 서일을 총재로 한 대한군정서를 비롯하여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구춘선이 회장인 대한국민회의의 국민군, 이명순이 지도하는 훈춘한민회, 김성배가 지도하는 대한신민회, 최진동이 지휘하는 군무도독부, 이범윤을 총재로 추대한 대한의군부, 김국초가 지도하는 혈성단, 김중건이 지도하는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등이었다.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중국동북지역한국독립운동사』, 172쪽.
대한독립군단은 서일을 총재로, 부총재에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총사령 김규식, 참모총장 이장녕, 여단장 지청천, 중대장에 김창환, 조동식, 윤경천, 오광선 등을 선임하였다.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8, 99쪽.
그리하여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1월 초 일제의 연해주 침략군인 포조군(浦潮軍)의 경계망을 뚫고 러시아 이만으로 진군하였다. 혹한의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은 동복(冬服)조차 입지 못한 상태였다. 쏘만국경을 넘어 이만에 도착한 대한독립군단은 서둘러 무기구입에 노력하였다. 군자금이 모이면 우선 무기구입에 충당하였으므로 피복이나 식량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다행히 이만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 출병했던 체코부대나 슬라브군대가 고국으로 돌아가며 장총을 싼값으로 팔고 있었다.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100쪽. 대한독립군단은 무기구입 활동과 함께 치따 극동공화국 정부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지원을 약속한 극동공화국 정부는 이만이 일본군 주둔지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상호 충돌을 염려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자유시(알렉셰호스크)로 이동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대한독립군단이 자유시로 이동할 때 극동공화국 정부가 독립군단의 무장을 일시 해제시킨다는 것이었다. 일제에 독립군단의 무장 소식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과 일단 무장을 해제한 후 자유시에서 신무기를 지급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이에 홍범도와 지청천, 김혁 등은 자유시로 이동하여 신무기로 무장을 갖추고 항일전을 수행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김좌진 등 대한군정서 지도부는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다시 만주로 나갈 것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김좌진, 이범석, 나중소 등은 1921년 3월 경 우수리강을 건너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대한독립군단 장병들은 무기를 일단 극동공화국 정부에 맡기고 열차편을 이용하여 1921년 3월 초 이만을 출발하여 자유시로 향했다. 자유시 일대에 집결한 만주 독립군은 무장 세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노령에 있던 이만군대, 니항군대, 자유대대 등 빨치산 부대와 통합하여 ‘대한의용군총사령부’를 결성하고 군사훈련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무장단체 사이에 주도권 쟁탈을 위한 암투가 벌어지게 된다. 자유대대 대대장인 오하묵과 니항군의 실력자 박일리야 사이의 암투가 그것이었다. 박일리야는 고려공산당 계열(상해파)인 이용과 손잡고 찌타 극동공화국에 교섭하여 군권을 장악하려고 기도하였고, 오하묵(이르쿠츠크파)은 이르쿠츠크에 있는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와 교섭하여 군권 장악을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표면상의 이유였고 갈등의 뿌리는 이르쿠츠파와 상해파의 파쟁에 연원해 있는 것이었다. 극동공화국 군부는 상해파 계열 니항군의 명칭을 ‘사할린의용대’로 바꾸고 모든 무장단체는 사할린의용대의 관할 하에 둘 것을 명령하였다. 군정위원장 박일리야는 우선 부대 주둔지를 자유시 서북방 마사노프로 정하고 각 무장부대를 이동시켰다. 이에 대응하여 이르쿠츠파는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고 코카사스 기병 600명을 대동, 자유시로 들어왔다.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이와 같은 움직임에 대응하여 사할린군대(대한의용군) 지도자들은 대책을 협의하였다. 이들은 ‘상해 임시정부 봉대’를 고수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한 홍범도부대와 안무부대, 그리고 최진동부대의 일부는 개별적으로 자유시로 넘어왔다. 당시 한인 각 무장부대는 자유시와 마사노프에 나뉘어 대치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중국동북지역한국독립운동사』, 448쪽. 그 후 대한의용군(사할린부대)는 고려혁명군과의 협상에 의해서 자유시에서 약 3km 떨어진 수라세프카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 양측의 갈등이 계속 노정되면서 고려혁명군정의회 지도부는 평화적인 수단으로 한인부대의 통일을 기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즉시 무장해제를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1921년 6월 28일 새벽 5시경 이미 수라세프카 일대를 포위하고 있던 고려혁명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들었던 총부리를 동지에게 들이댄 것이었다. 전투는 고려혁명군측의 승리로 끝났다. 대한의용군의 무장은 해제되었고 소속 군인들은 명령 불복종 혐의로 체포되었다. ‘자유시참변’ 또는 ‘흑하사변’으로 불리우는 이 유혈충돌의 결과, 최소한 40명의 사망자와 450명의 행방불명자가 생겼고, 428명의 군인은 죄수부대로 편성되어 아무르주의 깊은 삼림지대 우스문으로 이송되어 강제노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또한 72명은 중대 범죄자로 분류되어 이르쿠츠크 감옥에 투옥되었다. 자유시참변을 통해 사상자가 얼마인지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최소한 행방불명자와 죄수부대의 상당수는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유시참변은 그때까지 피땀 흘려 이룩한 만주 독립군의 역량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민족 통한의 사건이 되었다.
한편 자유시참변으로 독립군이 막대한 타격을 입고 밀산을 중심으로 재기를 위해 군사훈련을 하던 중 1921년 8월 26일 당벽진에서 수백명의 마적들이 야습하여 진중이 초토화되었다. 이로 인해 훈련 중이던 수많은 청년 병사들이 희생당하자 서일은 다음날 독립군 지휘자로서 책임을 지고 자결을 결심하였다. 1921년 8월 27일 41세의 나이로 순국한 것이다. 자유시참변으로 수많은 인명을 잃은 독립군 가운데 일부는 소련 적군에 협력하거나 또는 포로가 되어 그 곳에 억류되는 한편, 나머지는 병력을 수습하여 북만주로 탈출하였다. 따라서 1921년 8월 이후 북만주지역에는 또다시 독립군 세력이 형성되었다. 채영국, 「경신참변(1920년)후 독립군의 재기와 항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7, 1993, 19-20 참조. 즉 김좌진이 이끄는 대한군정서군(북로군정서군)은 밀산과 영안현에서, 구춘선이 이끄는 국민회 계통의 병력은 돈화와 액목현에서, 그리고 신민단, 광복단, 한민단 등은 각각 영고탐, 목단강, 동녕현 등을 중심으로 재기를 도모했다. 대한독립군단의 일부 부대는 1921년 3월 21일 자유시로 이동하였으나 지휘부는 이만에 남았다. 홍범도․최진동을 비롯한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이 자유시로 옮긴 것은 5월 중순 경이었다. 이때 서일을 비롯한 김좌진․이범석 등 대한군정서 지휘부는 자유시로 가지 않고 이만에서 일산으로 되들아 왔다. (박영석,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독립운동」, 『만주지역 한인사회와 항일독립운동』, 국학자료원, 2010, 102쪽) 이들은 북간도 각지에 흩어진 독립군 낙오병과 노령에서 제각각 돌아온 병사들을 모으고 서간도의 독립군과도 연락을 취했다.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으로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군들은 각각 재기하면서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계속적으로 소규모 부대를 유지하면서 일제와 무장투쟁을 전개한다는 것은 전력상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북만주지역에 산재해 있던 각 독립군단은 1922년 8월 4일 이범윤, 김좌진 등을 중심으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독립신문》1922년 8월 22일자.
대한독립군단의 군사통일운동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자 각지에서 활동하던 이전의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의 간부들이 다시 모여 대한군정서를 재조직하기로 결정했다. 1924년 3월 재조직된 대한군정서의 간부들로는 총재 현천묵, 군사부장 조성환, 서무부장 나중소, 재무부장 계화를 비롯하여 김규식, 이장녕, 김혁 등이었다. 독립군 단체의 군사통일을 위해 활동하고 있던 이범윤, 김좌진 등의 대한독립군단이나 재건된 대한군정서는 모두 청산리대첩의 주역이고, 대한군정서의 후신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북만주지역에서만이라도 군사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부여족통일회의’를 결성한 후 영안현 영고탑에서 회합을 갖고 협의 끝에 마침내 1925년 3월 15일 북만주지역의 통일된 독립운동단체로 ‘신민부’를 창설하게 되었다.
6. 나오는 글
만주는 민족의 고토이며 민족의 역사와 정신의 발상지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많은 민족운동자들은 만주를 주목했다. 이곳에는 1860년대 이후 조선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고, 일제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다. 만주일대와 연해주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여 한인사회를 건설하고 이를 기반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것이 민족운동가들의 독립운동 방략이었다. 이러한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은 구국계몽운동 계열 가운데 신민회가 주도하였다. 신민회의 계획에 따라 1911년 4월 이회영 형제를 비롯하여 이동녕, 이상룡, 김동삼 등이 만주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교민 자치단체인 경학사를 설립하고 무관학교를 표방한 신흥강습소를 건립했다.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한 무관학교에서는 10년간 3,500명의 독립군 기간요원을 양성했다. 이들이 만주 무장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한편 북간도지역에서는 서간도지역 보다 먼저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되었다. 이상설, 정순만 등은 1906년 8월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중심으로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상설이 헤이그특사로 파견되면서 이 계획은 중단되었다. 이후 명동학교를 비롯하여 수많은 한인학교가 설립되어 민족교육을 실시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선도하게 되었다. 또한 대종교 계열의 민족지도자들도 북간도에 망명하여 무장항일전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힘썼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지역에서는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독립군을 모집하고 독립군단을 편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북간도지역에서는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국민회, 대한군무도독부 등 독립운동단체에서 독립군부대를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맹렬히 펼쳐나갔다. 서간도지역에서도 서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단, 대한청년단연합회, 광복군총영, 대한독립군비단을 중심으로 부대를 편제하고 무장투쟁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편성된 독립군의 대일항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이다. 봉오동승첩은 홍범도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맞아 싸운 최초의 대규모 승전이었다. 봉오동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만주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이른바 ‘간도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하고 대규모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대규모 병력과 정예 무기를 보유한 일본군과 대적하기 어려웠던 독립들군은 피전책을 택하게 되고 백두산록 지대로 이동하였다. 2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화룡현 일대를 포위하면서 공격해 오자 독립군도 이에 맞서 결전을 준비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은 독립군들의 투철한 항전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한인 부락민들의 희생적인 지원이 승전을 가능케 한 것이다.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청산리대첩에서 승리한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는 밀산으로 장정을 개시했다. 밀산에서 다시 이만을 거쳐 자유시까지 장정은 계속되었다. 도중에 김좌진부대의 주력은 만주로 귀환하지만 자유시로 들어간 독립군들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파의 파쟁에 희생되어 자유시참변을 맞게 된다. 자유시참변으로 그때까지 힘들게 양성해왔던 많은 독립군들이 희생되면서 만주 독립군의 역량은 커다란 타격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자유시에서 탈출한 독립군들은 만주로 귀환한 이후 만주에 남아있던 독립군들과 힘을 합하여 경신참변 이후의 만주 사태를 수습하고 새로운 독립군단을 재건하게 된다. 그리하여 1920년대 중반에는 만주지역에서 군정부의 역할을 수행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가 정립하게 되었다. 삼부는 이후 이당치국의 이념에 따라 북만주지역에서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을 조직하고 각각 당군(黨軍)인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이후 중국 구국군과 함께 한․ 중연합부대를 운용하면서 일제와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1930년대 중반부터 이 가운데 일부가 동북항일연군에 편입되고, 일부는 중국 관내로 들어가 한국광복군의 원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