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의 서재필 동상
워싱턴의 서재필 동상
워싱턴 한국인 동상 1호로 서재필 동상이 한국총영사관 앞에서 제막됐다. 양복 차림에 왼손에 재킷을 든 모습이 고향 전남 보성에 있는 동상과 같다. 미국 한인사회는 '재미한인의 아버지'라 할 서재필 동상이 한인 젊은이들의 정체성 확립에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워싱턴시도 6일을 '서재필의 날'로 선포했다. 1885년 6월 스물한 살 조선 청년 서재필이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내린 지 120여년 만이다.
미국 수도 워싱턴엔 300여개의 동상이 있다. 그 중 절반이 외국인 동상이다. 처칠, 간디부터 공자, 푸시킨까지 동·서양 위인을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남미 독립운동의 전설적 지도자 시몬 볼리바르도 서 있다. 대부분 각국 대사관이나 교민사회가 만든 것이다. 서양에선 이미지가 좋지 않은 칭기즈칸 동상도 추진되고 있다. '세계의 수도'에선 외교 경쟁뿐 아니라 자기나라 위인·영웅 알리기 경쟁도 뜨겁다.
서재필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사이 온 가족이 역적으로 몰려 죽는 바람에 혈혈단신이 됐다. 그는 믿었던 일본 정부가 조선의 망명 정객들을 냉대하자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행을 결심했다. 미국 선교사들이 이들을 도왔다. 낮엔 막일을 하고 밤엔 영어를 배우던 서재필이 운 좋게 후원자를 만났다. 펜실베이니아 사립고를 마치고 워싱턴 컬럼비안대(지금 조지워싱턴대) 의학부를 졸업했다.
서재필은 1890년 미국 시민이 됐다. 미국 초대 철도우체국장의 딸과 재혼해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됐다. 그는 1895년 갑오경장이 시작되면서 개화파 정권 권유로 귀국했다. '독립신문'을 만들며 활약하던 서재필은 수구파가 다시 정권을 잡자 1898년 미국으로 추방됐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재산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예순이 넘어 본업인 의사로 돌아가 일해야 했다.
서재필은 광복 후 1947년 미 군정 최고고문으로 귀국했다가 정부 수립 후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세상을 떴다. 60년 넘게 미국에 살면서도 조국의 개화와 독립에 평생을 바쳤다. 교민사회와 주미대사관은 그가 몸으로 실천한 조국애를 동상으로 구현했다. 교민사회는 2010년까지 아메리칸대 구내에 들어설 이승만 대통령 동상에도 건립비를 대기로 했다. 재미한국인이 지닌 자부심의 표현이자 고국사랑이 변치 않는다는 다짐으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