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동학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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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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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1차 동학농민운동
한자표기 東學農民運動
이칭 1차 동학운동, 1차 동학농민혁명, 1차 동학혁명, 1차 농민봉기
유형 농민운동
시대 조선
날짜 1894년 4월
관련인물 서장옥,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관련단체 동학
관련장소 황토현, 백산성


정의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동학접주 서장옥 전봉준 등을 중심으로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

내용

창의문 발표

고부민란 이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로 부임한 이용태(李容泰)는 사후처리를 동학교도 탄압의 기회로 삼아 온갖 악행을 자행하여 그들의 격분을 샀다.[1]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켜 농민봉기의 주모자를 수색하는 한편 동학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2]
1894년 4월 전봉준은 동학접주 김기범(金箕範)·손화중(孫華中)·최경선(崔敬善) 등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천명하는 창의문(倡儀文)을 발표하였다. 이 창의문에 근방의 10여 읍에서 호응하고, 10여일 만에 1만여 명이 동원되었다. 동학교도와 농민과의 결합은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봉기에 앞장서게 되었다.[3]

행동강령

전봉준은 4월 말 김개남과 모의하여 고부·흥덕·고창·부안·금구·태인 등 각처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고부 백산성에 집결시켰다. 여기서 항전의 대오를 갖춘 후 전봉준을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김개남이 총관령(總管領)으로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전봉준은 우선 창의의 뜻을 천명하는 4개 항의 행동강령을 선포하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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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손상하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
③ 일본오랑캐를 내쫓아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하여 권귀(權貴)를 모두 죽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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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5]


황토현전투에서의 승리

5월에 들어서면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부안관아를 점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과 초군(哨軍) 이재섭(李在燮) 등에게 명하여 별초군 250명과 보부상으로 편성된 관군을 이끌고 부안 방면의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게 하였다. 관군은 5월 10일에서 11일 새벽에 걸쳐 도교산(道橋山)에 근거를 둔 동학농민군과 황토현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황토현전투에서 승리[6]하자 동학농민군은 불과 한 달 만에 호남 일대를 휩쓸면서 관아를 습격하고 옥문을 부수어 죄수를 방면하였다. 또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농민들에게 못된 짓을 일삼던 이서가(吏胥家)에 방화하였다.[7]

청군차용 주장

전라감사 김문현의 보고에 의하여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알게 된 정부는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결정하였다. 5월 6일 전라병마절도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고 경군 8백 명을 보내 현지로 출동하게 하였다. 그러나 5월 11일 전주에 입성한 경군은 극도로 사기가 저하되어 도망자가 속출함으로써 병력이 반감되어 있었다. 이 병력으는 동학농민군을 추격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한 초토사 홍계훈은 정부에 증원군의 파견을 요청하는 동시에 청군차용(淸軍借用)도 아울러 주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증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5월 19일 장위영병 300명과 강화병(江華兵) 500명을 증파하였다.[8]

동학12개조폐정개혁안

동학군은 관군과 여러 차례 접전을 벌였으나 소총과 죽창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차차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정부는 고부군수·전라감사·안핵사 등을 이미 징계하였고, 앞으로도 탐관오리는 계속 처벌할 것과 폐정(弊政)의 시정을 약속하였다.[9]
이렇게 되자 동학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持久戰)을 벌이는 것이 점점 더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청·일 양군이 출동하여 국가의 안전이 염려되는 시기에 정부군과 싸운다는 것은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이라 판단한 동학군은 동학12개조폐정개혁안을 발표하였다. 동학군은 정부군의 선무공작에 순응하여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강화(講和)가 성립된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하고 동학군은 폐정개혁의 실시와 교세확장을 위하여 전라도 53주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은 이미 상륙하였고, 일본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10]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동학농민운동 고부민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동학농민운동 1차 동학농민운동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동학농민운동 2차 동학농민운동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전봉준 동학농민운동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김개남 동학농민운동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손화중 동학농민운동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홍계훈 1차 동학농민운동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1차 동학농민운동 황토현전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동학12개조폐정개혁안 1차 동학농민운동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1차 동학농민운동 백산성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집강소 1차 동학농민운동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공간정보

  • 동학농민운동 유적지

시각자료

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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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주석

  1.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정숭교, "동학 농민 운동",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정숭교, "동학 농민 운동",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8.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동학운동", 『doopedia』online, 두산백과.
  10. "동학운동", 『doopedia』online, 두산백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동학운동",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정숭교, "동학 농민 운동",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