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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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흑룡강성 계서시 118현도 영성촌(黑龙江省 鸡西市 一一八县道 永胜村) 서일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

서일(徐一)은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 출신이다. 함경도의 유학자 김노규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 함일학교 사범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고향에서 10년간 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하다가 일제가 한국을 강제병탄 하자 만주로 망명했다. 망명 후 왕칭현(汪靑縣)에 명동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대종교에 입교했다. 대종교 제1세 교주 나철로부터 교리를 전수받고 대종교에 귀의했다. 특히 서일은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과 함께 포교에 나서 교세 확장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서일은 1911년 이후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북간도로 건너온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1911년 7월 중광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추대됐다. 중광단에 참가한 인물들 대부분은 대종교인들로서 백순·현천묵·박찬익·계화·김병덕 등 중광단의 지도층이 대종교의 중심 인물이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서일은 중광단을 개편하여 5월 대한정의단으로 발전시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다. 대한정의단 단장에 취임한 서일은 비밀리에 독립군을 편성하고 부대원을 모집하였으며, 산하단체로 대한군정회를 조직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무렵 대종교2세 교주 김교헌이 그에게 종사직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위해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 대한정의단 총재 서일은 1919년 7월 계화·김붕·김일봉 등과 함께 일본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原敬)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은 본격적인 항일투쟁 준비를 마친 서일이 일제에게 보낸 일종의 통첩으로 여겨진다. 서일은 김좌진·조성환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길림군정사와 연합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대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 총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대한군정서의 중앙 조직은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누었으며, 총재부는 군정서의 대외업무와 행정업무를 담당하였고, 사령부는 군사부분을 담당했다. 사령부 총사령관 김좌진은 이장녕·나중소 등과 함께 대한군정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1920년 2월 초 왕칭현 시다포(西大坡) 스리핑(十里坪)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했다. 김좌진은 사관연성소 소장에 임명되어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으로 교관과 각종 교재를 지원받았다. 이범석과 김규식등이 교관에 임명되어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사관연성소는 1920년 9월 9일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교성대가 조직됐다. 이때 3백여 명으로 조직된 교성대는 최정예부대로서 대한군정서의 주축이 되어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대첩 이후 서일이 이끄는 대한군정서를 포함한 여러 독립군단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미산(密山)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대한독립군·대한국민회 등 9여 개 독립군 단체는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서일은 총재로 추대됐다. 1921년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자유시참변(자유시사변)으로 타격을 입고 미산으로 돌아왔다. 서일은 무장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미산 인근의 당비진(當壁鎭)에 머물며 독립군 양성을 계획했다. 당비진은 주변이 광활한 토지와 하천으로 된 지역이기에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지역이었으며, 또한 일제의 감시와 침입의 위협이 적고 위급한 상황이 되더라도 국경이 가까이 있기에 러시아로 피신할 수 있어 독립군을 양성하기에도 알맞은 곳이었다. 서일은 북만주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이곳에 둔병제를 실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1921년 8월 26일, 당비진으로 마적이 습격하여 독립군과 한인들이 사망하는 ‘당벽진참안(當壁鎭慘案)’이 발생했다. 이를 겪은 서일은 자유시참변에 대한 책임과 함께 자신을 따르던 동지들의 죽음에 비통해 했다. 결국 8월 27일 아침, 당비진 뒷산에 올라 자진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