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취회
보은취회(報恩聚會)
서병학은 같은 해 3월 충청도 보은에서 ‘척왜양(斥倭洋)’의 기치를 내건 동학의 ‘보은취회(報恩聚會)’를 적극 주도하였다. 이 당시의 위치는 ‘차좌(次座)’였으나 사실상의 보은취회 주도자였다. 그러나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 어윤중(魚允中)의 해산 명령 이후 동학의 상층 지도부가 몰래 도망, 보은취회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1893년 3월 11일, 報恩 帳內里에서 시작된 ‘보은취회’는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를 밝히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전라도 金溝懸 院坪에서 이루어진 ‘院坪聚黨’과 함께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학계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금구취당’이 동학농민전쟁의 前史로서 그 정치적 성격이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에 비해 ‘보은취회’는 물리적 투쟁을 되도록 자제하려 했기 때문에 한계를 보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보은취회가 동학교단의 조직역량을 확인시킨 집회였던 점, 이전의 신원운동이 ‘교조의 신원’이라는 종교적 요구 중심으로 이뤄졌던 데 비해 보은취회는 ‘척왜양’의 기치를 전면적으로 드러낸 집회였던 점, 그 목적이 척왜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탐학관리와 세도가들을 처단하고자 하는 데 있었던 점으로 볼 때 보은취회 역시 사회개혁운동의 한 맥락으로, 또한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 투쟁으로서 일정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보은취회는 우선 전국 각 지역에서 수만 명의 道人들이 참가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조정에서 파견된 宣撫使 魚允中이 올린 보고서를 보면, “처음에는 부적, 주술로써 무리를 현혹하고 참위를 전하여 세상을 기만하였는 데, 필경에는 才氣를 갖추고도 뜻을 얻지 못한 자, 貪墨이 횡행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민중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자, 外夷가 우리의 利源을 빼앗는 것을 분통하게 여겨 큰소리 하는 자, 貪士·墨吏의 침학을 당해도 호소할 바 없는 자, 京鄕에서의 武斷과 협박때문에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는 자, 京外에서 죄를 짓고 도망한 자, 營邑屬들의 부랑무리배, 영세농상민, 풍문만을 듣고 뛰어든 자, 부채의 참독을 견디지 못하는 자, 常賤民으로 뛰어나 보려는 자가 여기에 들어 왔다”0633)라고 하여 당시 사회의 기층민중과 사회구조에 큰 불만을 가진 세력 등 다양한 계층에서 모여 들었음을 보여 준다. 3월 말까지 지속적으로 모여든 인원은 대략 3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산아래 평지에 성을 쌓고 그 안에서 대오를 정비하며 ‘斥倭洋倡義’라고 쓴 기를 내거는 한편 새로운 방문과 통문을 냈다. 날이 갈수록 숫자가 느는 데다 통문을 나붙이는 등 세가 더해지자 3월 16일 보은 군수 李重益이 해산령을 내렸으나 이에 대해 도인들은 “창의함은 오직 척왜양에 있으니 비록 巡營의 甘飭이나 主官의 面諭라도 그칠 수 없다. 또 동학은 처음부터 邪術이 아니며, 설사 사술이라 하여도 임금이 욕을 당하고 신하가 죽는 지경에서는 忠義 하나 뿐이니, 각처 유생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죽음을 맹세하고 충에 진력하고자 한다”라고 하여 해산을 거부하고 다시 “왜양지사를 치는 것으로 죄삼아 가둔다면 和를 주장하는 매국자를 상준단 말인가? 어찌 우리 순상의 밝음으로써 헤아리지 못함이 이처럼 심하단 말인가? 혹 미혹하여 왜양의 신복이 되려는 자는 관령을 따르라”라는 榜을 내걸어 척왜양의 의지를 과시하였다.
이처럼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보은군수의 해산령을 거절하면서 척왜양의지를 더욱 강력하게 표출했다. 보은집회의 세력들이 척왜양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물론 그것이 큰 목적이기도 했지만 당시 유림에 풍미하고 있던 衛正斥邪사상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그들이 집회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척왜양은 조선사회를 이끌고 있던 봉건적 지배층에 의해 무난하게 용납될 수 있었던 봉건적인 대외사상에 부합되는 것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3월 22일 보은군수의 해산령도 거절하고 “지금에 이르러 생명이 도탄에 빠진 것은 방백수령의 탐학무도함과 세호가의 무단에 있으니 만약 지금 소청하지 못하면 어느 때에 국태민안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지방수령들의 탐학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갈수록 확대되는 보은취회의 양상을 방관하고 있을 수 없게 된 조정에서는 3월 25일 충청감사 趙秉式에게 책임을 물어 파직시키고 이들을 해산시킬 선무사로 어윤중을 보내는 한편, 충청병사 洪在羲에게 군사 3백 명을 이끌고 장내리로 가게 했다. 양호선무사 어윤중은 보은출신이었다. 그는 장내리로 가서 접도들을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하고 협박하면서 왕의 칙유문을 발표했다. 이에 보은취회 지도부는 해산을 약속하고 노약자와 어린이를 돌려 보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집회는 이합집산의 양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특히 보은취회 지도부는 4월 1일 순무사 어윤중이 公州營將, 淸州兵營 軍官, 報恩 군수를 대동하고 찾아와 왕의 綸音을 읽고 퇴산을 명하자 3일 안에 해산하기로 약속을 하였고 崔時亨·孫秉熙·서병학(徐丙鶴) 등은 도인들을 남겨 둔 채 4월 2일 밤을 틈타 도망하고 말았다.
광화문 복합상소에 이어 보은취회 역시 무력하게 해산되고 만 것은 결국 지도부가 무력투쟁을 회피한 결과였다. 이같은 보은집회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되고 있다. 첫째는 보은집회 지도부의 기만성, 불철저성, 패배주의로 인해 별다른 성과없이 실패한 점을 들어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로서 높은 위치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고,0638) 둘째는 이 집회를 통해 민권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종교운동에서 벗어나 정치적 방향으로 나아간 성격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 그 의의를 어느 정도 평가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금구취당을 주도한 세력의 독려에 힘입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지금까지 학계의 연구성과로 볼 때 보은집회는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로서 큰 위상을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신원운동의 차원에서 정치적 투쟁의 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는 역사적 의의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한편, 보은취회가 열리던 시기에 전라도 금구현 원평에서도 취회가 열리고 있었다. ‘金溝聚黨’이 바로 그것이다.충청도 보은의 장내리에서 이른바 보은취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全羅道 金溝懸 水流面 院坪里에서도 동학교도들의 별도 집회가 열리고 있었음은 여러 자료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원평은 전라감영이 자리잡고 있는 전주에서 서남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큰 場이 서 인근에서 생산되는 物産이 풍부하게 거래되었으며 따라서 사람의 왕래가 잦은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대규모 집회를 가질 수 있는 여건이 충족된 데다 官衙가 있는 금구로부터 적당한 이격거리를 두어 여러 모로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母岳山과 金山寺로 상징되는 독특한 지리적 배경은 종교적 집회장소로의 선택에 중요한 고려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즉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원평지역 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비결신앙의 상징처럼 일컬어지고 있다. 당시에도 민간신앙의 근거지였고 이 곳을 항상 감싸고 있는 적당한 신비로움이 고단한 현실에 찌들고 지친 민중들을 효과적으로 끌어모아 주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원평집회가 수월하게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 중의 하나는 이곳이 보은으로 가는 전라도지역 교인들의 중간 기착지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원평은 정읍·고창·장흥·영광·나주·함평·무안·순천·영암쪽에서 올라 오는 교도들이 반드시 거쳐 지나야 하는 거점이었다. 더욱이 金溝는 동학지도자 金德明包의 본거지로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金德明이 동학교단의 大接主 위치에서 일정 정도의 역할을 맡았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