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공신
정국공신(靖國功臣)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
중종반정 후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이 공을 논한 결과 1등 병충분의협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協策翊運靖國功臣)에 유자광(柳子光)·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장정(張珽)·홍경주(洪景舟) 등 5명, 2등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에 운수군 효성(雲水君孝誠)·심순경(沈順徑)·변수(邊修)·최한홍(崔漢洪)·윤형로(尹衡老) 등 13명, 3등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에 고수겸(高守謙)·심정(沈貞)·채수(蔡壽) 등 83명을 뽑아 총 101명을 상계(上啓)하였다.그 뒤 박원종·유순정·성희안 등이 영의정 유순(柳洵), 우의정 김수동(金壽童)의 천거로 1등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으로 녹공(錄功)되면서 모두 104명으로 늘어났다.그러나 국가의 재정 형편 등을 고려해 3등 83명 가운데 심정 이상 30명을 3등으로, 변준(卞儁) 이하 53명을 4등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으로 구분하게 되었고, 권균(權鈞)·김준손(金俊孫)·반우형(潘佑亨)·이곤(李坤)·우정(禹鼎)·김무(金碔) 등 6명과 내관(內官) 문치(文致)·서경생(徐敬生)·김계공(金繼恭)·김숙손(金叔孫)·김은(金銀)·임원산(任元山) 등 모두 12명이 4등에 추가됨으로써 116명으로 늘어났다가 뒤에 윤상로(尹湯老)가 3등 제31번째로 녹공됨으로써 1등 8명, 2등 13명, 3등 31명, 4등 65명 등 모두 117명이 공신에 책록되었다.공신의 성분은 종실 5명과 환관 6명을 제외한 106명 가운데 실질적 훈구계(勳舊系)로 판단되는 인물은 33명으로서 전체의 31%, 나머지 비훈구계가 70명으로서 약 66%를 차지하고 있다. 더구나 일급 거족(鉅族)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은 모두 19명 정도로서, 그것은 점점 세력이 약해지던 일부 훈구 세력과 문벌(門閥)이 불투명한 비거족(非鉅族) 출신으로 짜여진 구조상의 취약점을 지니고 있었다.뿐만 아니라 공신은 여러 친족 집단의 연맹체와도 흡사한 성분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4촌 이내의 근친만도 45명이나 있었다. 그 구성은 장인과 사위간, 외숙과 생질간, 처남과 매부간, 이종사촌간 그리고 사돈간 등 넓은 범위에 분포되어 있어, 모록(冒錄)의 가능성이 많았던 만큼 공신 집단의 허구성이 컸음을 보여 주고 있다.또한 공신이 벼슬에 나간 경로(經路)를 보면 문과 급제자 35명, 무과 급제자 28명, 음서(蔭敍) 3명, 미상 40명으로 나타나지만, 미상 40명 가운데 실직(實職)에 벼슬살이를 한 29명을 실질적인 음서로 간주하면 음서가 32명으로 늘어난다. 이처럼 무·음(武蔭) 우세의 성분도 취약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들 가운데에는 연산군 때의 총신(寵臣)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반정 당시 재직 중이던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절의(節義) 내지 명분상 비공신 계열에 대한 우월성 결여, 정치적 이념 내지 새로운 통치 질서 수립을 위한 전망적 자세의 결여 등 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어서, 후일 이들이 공격을 받는 요인이 되었다.공신들은 반정 후 비공신 계열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1507년 유자광과 그의 손자 승건(承乾)이 삭훈되고, 1513년 박영문·신윤무가 모반으로 무고당해 옥사(獄事)함에 따라 그들의 형 및 사위가 연루되어 삭훈되었으며, 1519년에는 2등 운수군 효성·이계남(李季男)·유순·김수동 등 8명, 3등 장온(張溫)·이석번(李碩蕃)·강혼(姜渾)·김수경(金壽卿)·윤상로 등 12명, 4등 변준(卞儁)·변사겸(邊士謙)·한숙창(韓叔昌)·성희옹(成希雍)·홍경림(洪景霖) 등 56명을 포함 모두 76명이 삭훈되었다.이것은 공신 세력의 존립 명분 자체를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훈구 세력에 대한 사림파 세력의 잠정적 승리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 때의 삭훈은 기묘사화를 유발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사화 후 곧 복적(復籍)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신 세력의 존립 명분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단지 자신들에 의해 옹립된 중종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존재 의의만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