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반 처 연산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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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10월 2일 (일) 14:2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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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 처 연산서씨(金槃 妻 連山徐氏)

조선 중기의 열녀.

본관은 연산 서씨(連山).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군공(軍功)으로 원종공신에 녹권(錄券)되고 인조 때 병조참판에 증직된 서주(徐澍)이고, 어머니는 정부인에 증직된 광주이씨(廣州李氏)이다. 2남 5녀 중 6녀로 태어났다. 오빠는 석성현감으로 승정원좌승지에 증직된 서후적(徐後積)과 원종공신에 녹권되고 호조좌랑과 사복시정에 증직된 서효적(徐效積)이다. 언니는 판관 최정완(崔貞完)의 부인, 온양인으로 참판에 증직된 정완(鄭脘)의 부인, 의령인으로 좌찬성에 증직된 남식(南烒)의 부인 등 3명이다. 여동생은 기계인으로 참판 유백증(兪伯曾)의 부인이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유학자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형부 남식의 손자이다.

김반 처 연산 서씨는 병자호란 때 왕자, 비빈, 종실, 사대부의 부녀자들이 피신할 때 셋째 아들 김익겸(金益兼)과 함께 강화도로 갔다. 이때 허주 김반과 그의 둘째 아들인 창주(滄洲) 김익희(益熙)는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다음 해인 1637년(인조 15) 정월 청(淸)군이 바다를 건너 강화도를 함락하려는데 아들 김익겸은 효원(孝元) 권순장(權順長) 등과 함께 관군에 협력하여 죽음으로써 지키자고 약속하였다.

김익겸은 활을 잡고 화살을 가리키며 감연히 말하기를 “그래도 한 사람의 적수는 되지 않을까 보냐.”라고 말하였다. 그 달 22일에 일이 급해짐을 알고 김익겸은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을 따라 남쪽 성루에서 화약을 터뜨려 분신자살을 하였다. 연산 서씨는 전세가 날로 불리해지는 남한산성의 소식을 들으며 눈물겨워하면서 식사를 거르더니 아들 김익겸이 순사(殉死)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목욕을 하고 나서 자결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김반과 나머지 아들들이 강화도에 들어가 연산 서씨와 김익겸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교하(交河)의 강가에 장지를 마련하고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4년 뒤 연산서씨의 사위 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이 충청감사로 있을 때 ‘산소골’이라 불리던 회덕현 정민리(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로 이장하였다. 본래 이 산소골은 회덕현에 속했던 정민역(貞民驛)이 있던 역촌이었으며 당시 묘의 이장을 위해 정민역은 수백 미터 떨어진 지금의 엑스포아파트 인근 아리고개 밑으로 옮겼다고 한다.

광산김씨 묘역에는 김반과 그의 부인의 묘 2기와 장자 김익렬(金益烈), 셋째 아들 김익겸, 손자 김만준(金萬埈)의 등의 묘와 김익겸의 충신정려, 손자 김만중(金萬重)의 효자정려, 연산 서씨와 연일정씨(延日鄭氏)의 열녀정려가 있다.

1639년(인조 17)에 정려가 내려졌으며, 대전 광산김씨 묘역에 열녀 정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