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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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

기자조선의 영역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