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토쿠 태자
쇼토쿠 태자(聖徳太子)
쇼토쿠 태자(일본어: 聖徳太子, 574년 2월 7일 ~ 622년 4월 8일(일본서기 - 621년 2월 5일설 있음))는 일본 아스카 시대의 황족이자 정치가였던 우마야도 황자(厩戸皇子) 또는 우마야도 왕(厩戸王)에 대한 후세의 호칭이다. 요메이 천황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긴메이 천황의 황녀 아나호베노하시히토 황녀(穴穂部間人皇女)이다.
아스카 문화의 중심 인물로서 스이코 천황의 치세에서 섭정(攝政)을 맡아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와 협력하여 정치를 행했다. 12계(十二階)의 관위와 17개조 헌법을 제정하는 등 일본 정치체제를 확립한 인물이었다. 또한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일본에 불교를 보급시켜 융성시킨 인물이었다. 실존이 불분명하며 일본에 불교를 보급시키러 간 백제의 아좌태자가 쇼토쿠 태자상으로 나타났다는 설이 있다.
스이코 천황 9년(601년), 이카루가노미야(斑鳩宮)를 지었다.
스이코 천황 10년(602년), 다시 신라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친동생 구메 황자(来目皇子)를 장군으로 하는 2만 5천의 군사를 지쿠시(筑紫)에 모았지만, 바다를 건널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왕자가 죽었고(신라의 자객에게 암살되었다는 설이 있다). 후임으로 임명된 이복동생 다이마 황자(当麻皇子)는 아내의 죽음을 이유로 수도로 돌아와 버려 결국 공격은 중단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쇼토쿠는 유학에 영감을 얻어 스이코 천황 11년(603년) 12월 5일, 소위 '관위(冠位) 12계(階)'라 불리는 관위제를 제정한다. 성씨제(氏姓制)와는 달리 재능을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천황의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다.
스이코 천황 12년(604년) 4월 3일, 「여름 4월 병인 초하루 무진에 황태자가 친히 처음으로 헌법 17조를 짓다(夏四月 丙寅朔戊辰 皇太子親肇作憲法十七條)」(《일본서기》). 17개조 헌법이라 불리는 이 법은 일본 최초의 법으로, 호족들에게 신하로서의 마음가짐을 가르치고 천황을 받들어 불법을 공경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스이코 천황 13년(605년), 왕자는 이카루가노미야로 옮겨 거주하였다. 수나라의 양견이 보낸 국서에 답하여, 스이코 천황 15년(607년),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 구라쓰쿠리노 후쿠리(鞍作福利)를 사자로 하여 수나라에 국서를 보냈다. 이듬해 수나라의 답사(答使)로서 문림랑(文林郞) 배세청(裴世淸)이 일본을 방문하였고 수나라로 귀국하였다. 《일본서기》에는 배세청이 수나라에 가져간 쇼토쿠 태자의 글에 "동쪽의 천황은 삼가 서쪽의 황제에게 고한다(東天皇敬白西皇帝)"고 쓰여 있고 《수서》에는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내니 별일 없는가?"라는 표현이 답서에 실려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양견이 분노했다고 전해져 있다.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그 자신도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던 왕자는 스이코 천황에게 《승만경》을 강의하고, 스이코 천황 23년(615년)까지 《법화경》과 《유마경》 등의 주석서인 《삼경의소(三經義疏)》를 저술하였다.
스이코 천황 28년(620년), 우마야도 왕자는 우마코와 의논하여 《고쿠기(國記》, 《천황기(天皇記)》 등의 사서를 편찬하였다.
스이코 천황 30년(622년), 이카루가노미야에서 쓰러진 우마야도 왕자의 회복을 빌던 왕자비 가시하데노 오오이라쓰메(膳大娘女)가 2월 21일에 죽고, 그 뒤를 따르듯 다음날인 22일에 우마야도 왕자도 죽었다.(《일본서기》는 동 29년 2월 5일, 서기 621년의 일이라 했음) 사후 생전에 왕자가 짓게 한 웅응정사에 큰 절을 지어 태자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로 삼았다. 최근의 역사학 연구에 있어서는, 일본서기 등의 쇼토쿠 태자상을 허구로 하는 설(說)을 외치는 연구자도 있으며 이 쇼토쿠 태자 상이 된 것이 원래는 당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모노노베와 대립했던 소가노를 지원하기 위해 건너간 백제의 아좌태자라는 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호류사에 전해 오던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는 백제 아좌 태자가 그린 것으로 전해졌으며 현재는 일본 제실 박물관에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