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서원
덕산서원(德山書院)
덕산서원(德山書院)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256번지에 있다. 대구 시민들은 도로명 주소 '청호로 46길 5-3 덕산서원'으로는 잘 가늠하기 어렵지만, '황금동 256 덕산서원'이라면 신천지아파트 입구 일대라는 것을 대략 떠올린다. 조선 시대의 교육기관인 서원은 보통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황금동 신천지아파트 입구는 예전처럼 산 좋고 물 좋은 청정 지역은 못 된다. 오늘날의 덕천서원 자리는 산 속이 아니라 신흥 개발지 한복판이 되고 말았다. 물론 덕산서원이 처음부터 지금처럼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회 지역에 세워진 것은 아니다.
이는 황금동의 본래 이름이 증언해준다. 황금동의 본명은 황청동(黃靑洞)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대구 부민들 일부는 이곳 산골로 피란했는데, 두 달 가량 뒤 의병을 일으키는 손처눌 선생이 '푸른 산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어 들녘의 곡식이 황금물결을 이룬다'는 뜻에서 이 일대에 "황청(黃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1977년, 저승의 다른 말인 황천(黃泉)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동명을 황금동으로 바꾸어버렸다.
어쨌든 전쟁이 났을 때 사람들이 피란을 와서 숨고, 푸른 산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덕산서원의 애초 터는 지금과 달리 한적한 자연 속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저 세월이 흐르고 개발과 도시화의 바람에 못 이겨 덕산서원도 결국은 주택가 안에 자리잡은 평범한 기와집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 덕산서원의 현판과 강당 마루가 보이는 풍경
덕산서원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절개를 지켰던 남은(南隱) 서섭(徐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서섭은 달성서씨 판서공파의 파조(派祖)로 세종 때 대과에 급제, 문종을 거쳐 단종 때에 이르러 자헌대부 이조판서까지 지낸 인물이다. 아득한 뒷날, 서섭의 충절을 알게 된 자손들과 유림에서 1926년 그의 묘소가 있는 황금동에 덕산서원의 모태인 첨모재를 건립했다. 1954년 중수했고, 최근 대대적으로 경역을 확장하고 당우(堂宇)를 신축하여 덕산서원이라 편액하였다.
서원 앞에 세워져 있는 작은 안내판을 읽으면서 본문에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은 사실에 대해 추정을 해본다. 서섭의 호에 은(隱)이 들어 있는 까닭을 헤아려보는 것이다. '숨을 은'은 본래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등 이성계 정권에 협력하지 않은 고려 충신들의 호에 즐겨 사용된 글자이다. 그렇다면 서섭은 누구에게 협조를 하지 않다가 피해를 입었을까?
▲ 덕산서원 경내에 세워져 있는 서섭 선생 신도비
본문이 서섭을 '조선 초기의 문신'이라고 밝힌 점에 주목한다. 서석은 이성계 또는 이방원의 협조 요청을 거부하고 숨어 살았던 인물인가? 그런데 뒤에 '세종 때 대과에 급제, 문종을 거쳐 단종 때에 이르러 자헌대부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서섭이 수양대군, 즉 세조의 권력 찬탈에 저항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어린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 무리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서섭은 '간신들을 물리치소서'라는 취지의 '척간소(斥姦疏)'를 단종에게 올린다. 그는 '척간소'에서 '선왕(세종)께서 원손(단종)을 안으시고 집현전 여러 신하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과인이 죽고 난 뒤 경등을 모름지기 이 아이를 잘 보호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비록 불초하오나 곁에서 들은 기억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나이다.' 하고 말한다. 서섭은 이 일로 귀양을 가고, 1453년(단종 2)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잡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聞昔長沙有此人 듣자하니 옛날 장사에 귀양 간 사람이 있다던데 今人我亦被誣人 오늘날 나 또한 남의 모함을 당했네 天必降人同賦性 하늘이 사람에게 같은 성품을 내렸으니 惡何人也善何人 악한 사람 누구이며 선한 사람은 누구인가
귀양을 간 서섭은 위의 시 '재적소시(在謫所時)'를 남겼다. '재적소시'는 '유배지에 머물면서' 정도의 뜻이다. 시의 내용은 대략 하늘은 이 땅에 같은 사람을 태어나게 하였는데 어째서 누군가는 악인이 되고 누군가는 선인이 되는지 알 수 없다는 탄식으로 헤아려진다. 과연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남을 죽이고 내치고 구석진 곳에 가두는 것일까? 서섭은 권력을 향한 수양 무리의 잔인함을 개탄했다.
그러나 서섭은 자신의 귀양보다도 더한 슬픔과 고통을 불과 2년 뒤에 겪게 된다. 1455년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을 죽인다. 서섭은 충신들이 6월 9일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네 마리 말에 매달아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車裂)에 처해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의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은 '문육신순절감음(聞六臣殉節感吟)'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擧天奉日死於忠 하늘을 떠받치고 해를 받들어 충의로 죽으니 萬古吾東第一忠 만고의 우리나라 제일 가는 충신일세 男兒此世生無面 남아로서 이 세상에 살 면목이 없으니 誰識中心有血忠 누가 마음에 피 맺힌 충성 있음을 알리
1457년(세조 3) 10월 결국 단종은 세조의 핍박에 못 이겨 목숨을 끊는다. 세조가 보낸 사약(賜藥)을 든 사신이 유배지 영월을 향해 다가오고 있던 그 순간, 단종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민간에는 단종의 주검이 청령포(淸?浦)에 떠있는 것을 엄흥도(嚴興道)가 남몰래 수습하여 지금의 장릉(莊陵) 자리에 안장했다고 전해진다.
서섭은 단종의 원통한 마지막 순간을 듣고 통곡했다. 어린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눈앞에 보이는 산은 문득 텅 빈 듯했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하늘의 해도 빛을 잃었다. 모든 백성들이 목을 놓아 울부짖으니 집집마다 부모가 별세한 듯 온 세상이 슬픔에 잠겼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살아남아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있으니, 장차 죽어 저승에서 어린 임금을 어찌 뵐 수 있을까! 서섭은 '문영월사변통곡(聞寧越事變痛哭)'을 써서 소년 임금의 애통한 원혼을 위로하고, 또 자신의 참담한 심사를 애써 달래었다.
山空木落日無光 산은 비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해도 빛을 잃었는데 痛哭家家考?喪 통곡소리 집집마다 요란하니 부모를 잃은 듯 堪愧微臣生在世 부끄럽구나 못난 신하 살아 이 세상에 있으니 他時地下面何相 뒷날 지하에서 무슨 낯으로 뵈올 것인가
세조의 후손들은 그 이후에도 잔인했다. 비명에 죽은 단종이 복원되는 데에는 240년도 더 걸렸다. 1698년(숙종 24)이 되어서야 비로소 노산군(魯山君) 대신 단종이라는 이름의 사용이 허용되었다. 당연히 서섭이 남긴 책과 글들도 금서(禁書)가 되었고, 집안에서조차 '쉬쉬' 하며 숨기기에 바빴다.
그 후 1920년, 후손 서의곤이 집을 수리하던 중 서섭이 남긴 문장들이 상자에 담긴 채 발견되었다. 무려 400년만에 서섭의 행적이 세상에 확연하게 드러난 찰나였다. 후손들은 자랑스러운 선조 서섭을 기리기 위해 1926년 재실 첨모당을 건축했고, 첨모당은 1994년에 이르러 덕산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덕산서원 강학 공간에는 4칸 강당인 충정당, 각각 3칸 건물인 동재 구인재와 서재 존성재가 있다. 강당 뜰 남쪽에 서원 사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강당과 구인제 사이 삼각지에는 서섭 선생 신도비가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제향 공간인 사당 경의사는 강당 뒤에 있어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성을 보여준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에는 유현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러고 보니 서원 정문인 외삼문의 현판에는 숭절문(崇節門)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외삼문 현판에 '절개 절(節)'이 들어 있는 것은 서섭의 호 중 한 글자가 '숨을 은(隱)'인 것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