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창재
1726년(영조2)~1781(정조5).
자 상보(尙甫). 호 오산(梧山). 서엽(徐曄)의 아들. 내자시정(內資寺正) 서연(徐兗)의 후손.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오하여, 7세 때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을 배울 때 능히 글자마다 뜻을 이해하였다고 함. 10세 때 이웃 마을에서 과거 급제를 축하하는 잔치자리가 벌어져 온 동네가 시끄러웠으나, 공은 단정히 앉아 태연하게 독서를 하니, 공의 부친이 “너만은 어째서 가서 구경하지 않느냐?”라고 하자, 공은 “제가 이 책을 읽으면 그 경사를 이룰 수 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분주하게 남의 영화를 부러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고 함.
15세가 되어 상서(尙書)를 읽었는데, 기삼백(朞三百)의 집전(集傳) 부분에 이르러서 윗사람이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자, 공은 방에 단정히 앉아 침식을 잊어가며 연구하여 마침내 밝게 이해하였고, 역경(易經)은 스승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능히 대의(大義)를 이해하였다고 함. 또한 음양(陰陽)・복서(卜筮)・병진(兵陣)의 학설도 폭넓게 공부하여 모두 그 귀결점을 이해하였음.
약관에 되어, 공령문을 공부하여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입격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한 이후 37세 무렵에는 완전히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및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취하여 잠심하여 쉼 없이 연구하였음. 공은 권구연(權九淵)・홍준(洪遵)・권정운(權正運)・배시진(裴是袗) 등과 같은 고을의 명사(名士)들과 함께 서로 강마(講磨)하였고, 이상정(李象靖)과는 누차 만나고 또 많은 서신을 왕복하였음.
약관에 되어, 공령문을 공부하여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입격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한 이후 37세 무렵에는 완전히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및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취하여 잠심하여 쉼 없이 연구하였음. 공은 권구연(權九淵)・홍준(洪遵)・권정운(權正運)・배시진(裴是袗) 등과 같은 고을의 명사(名士)들과 함께 서로 강마(講磨)하였고, 이상정(李象靖)과는 누차 만나고 또 많은 서신을 왕복하였음.
공은 유생들이 단계서원(丹溪書院)에서 거재(居齋)할 때에 훈장(訓長)으로 추대되어 유생들을 부지런히 가르쳐 계발시켜 주었으며, 다시 소수서원(紹修書院)의 강좌에 나가서 경전을 토론하니, 원근에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자들이 매우 많았음.
공은 만년에 몇 칸의 집을 지어 “주정(主靜)”이라고 명명하고, 좌우에 퇴계(退溪)의 유묵을 걸고 책상에 성현(聖賢)의 글을 놓아두고 항상 완미하였으며, 글 가운데 의미가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이해할 때까지 깊이 사색하기를 그만두지 않았음.
또한 대학(大學), 중용(中庸)에 더욱 힘을 써서 여러 해 동안 연구하면서, 「중용질의(中庸質疑)」를 저술하기도 하였고, 수학계몽(數學啓蒙)의 주석을 연구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풀어서 자질(子姪)들에게 보이기도 하였음.
또한 예서(禮書)에도 유의하여, 가례(家禮)의 편목을 나누고, 송대(宋代) 명현으로부터 우리나라 역대 유학자들의 변론에 이르기까지 뜻을 다해 수집하여 내・외편을 만들었음.(곧 가례집해(家禮輯解)임. 후에 여기서 관례 부분이 관례고정(冠禮考定)으로 출간되었음.)
문집이 간행됨. 이상정이 「梧山處士徐公行狀」을 찬하고, 채제공이 「處士徐公墓誌銘」을 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