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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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년(선조28)~1671년(현종12)
자 백순(伯順). 호 동고(東皐). 시시당(是是堂) 서량(徐亮)의 아들. 돈암(遯菴)의 6세손.
공은 일찍이 문단(文壇)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모두 12번이나 향시(鄕試)에 입격하기도 하였음. 또한 행의(行義)가 드러나서 향리(鄕里)의 모범이 되었다고 함.
공이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러 갔을 때에, 두 동생 서후득(徐後得)・서후종(徐後從)과 함께 모두 초시에 입격하여 복시(覆試)를 보게 되었는데, 당시 집권하고 있던 이이첨(李爾瞻)에게 빌붙은 자들은 모두 뜻을 이루던 형편이었으나, 공은 이이첨의 사주를 받고 이이첨을 한 번 만나볼 것을 권하는 자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과거장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 곧장 귀향하였음. 후에 이이첨이 패사(敗事)하였고, 사주를 받아 권하던 자도 연루되어 정배(定配)되어 가게 되었는데, 그가 도리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할 지경이었음. 또한 군(郡)의 아전배들도 “행실에 돈독한 군자를 알려 하거든, 서(徐) 공의 행동을 보라.”고 할 만큼, 독실한 군자로 칭송받았다고 함.
만년에는 생도(生徒)들을 가르쳤는데, 장랑(長廊)을 설치하여 이들을 늘 거처하게 하니, 원근에서 배우려는 자들이 운집하였고, 학업을 성취한 자도 많았다고 함.
특히 공은 순흥부의 복설(復設)을 청원하는 소(疏)를 조정에 올리기도 하였음.
현손(玄孫)인 창재(昌載)가 「處士東皐徐公墓誌」를 찬함.